시장자율에 맡겨선 안 될 파생상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호 02면

역시 사람은 어려울 때 본색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100년 만의 위기’를 맞으니 미국도 그저 그런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의 일 처리 솜씨도 별 볼일 없었고 금융회사들의 도덕적 해이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토록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쳤던 미국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관치 금융의 폐해가 한국을 망쳤다고 몰아붙였던 나라였다. 망할 기업은 시장 논리에 따라 망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했고, 구조조정을 늦추자 국제 신인도가 떨어진다고 협박했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하이닉스를 정부가 회생시키려 하자 국제무역기구(WTO) 규범에 어긋난다며 어깃장을 놓았고, 대우 계열 회사채를 산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해 주니 도덕적 해이만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은행은 자본이 튼실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의 리스크 관리와 재무 건전성을 본받으라는 충고까지 점잖게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위기를 맞자 180도 다른 행태를 보였다. 관치도 이런 관치가 없다. 민간 주택금융공사에 공적자금을 지원해 국유화했고, 민간 보험사에도 구제금융을 쏟아부었다. 대마는 불사였고 주주와 계약자들의 손실은 보전됐다. 부실 투자은행의 빚 보증도 서 줬다. 더 이상 손실은 없을 것이라던 투자은행들의 발표는 며칠 안 가 거짓말로 드러났다. 구제금융은 없다는 재무장관이나, 더 이상의 신용위기는 없을 것이라던 중앙은행 총재의 말도 허언으로 끝났다.

리스크 관리와 재무 건전성도 온데간데없었다. 5대 투자은행 중 무려 세 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한 방에 날아갈 정도로 리스크는 관리되지 않았고 재무구조는 불량했다. 돈을 빌려줄 때는 기초적인 신용조사도 하지 않았다. 소득을 불리거나 허위 신청해도, 심지어 신용불량자에게도 경쟁적으로 대출해줬다.

그러고는 이런 부실 대출을 첨단 금융기법을 통해 수익성 좋은 파생금융상품으로 둔갑시켰다면서 전 세계에 팔았다. 우리나라를 평가할 때는 그토록 야멸쳤던 무디스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신용평가사들은 제동을 걸기는커녕 ‘안전한 투자’라는 낙인까지 찍어줬다. 자기네 나라를 평가할 땐 한통속이었다. 회사는 망해도 최고경영자들은 거액을 챙기는 도덕적 해이도 횡행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없었고 국익만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지 못한다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우리 방식의 표준도 가능하다는 ‘코리안 스탠더드’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얻은 첫째 깨달음이다.

둘째 깨달음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파생금융상품이 얼마나 위험한가라는 점이다. 자칫 삐끗하면 나라 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큰 소득이다.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고성능의 컴퓨터를 활용해서 만들어진 요상한 파생상품이 쏟아진다.

내년 2월로 예정된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수많은 증권사와 은행이 투자은행 전환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금융사들의 탐욕과 감독당국의 무지, 현란한 금융기법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뒤지지 않는다.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게다. 그나마 미국은 40년의 파생상품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우리 정부에 감독 노하우가 있을 리 없다.

우리 정부는 ‘키코(KIKO)’라는 통화옵션상품이 있는지조차 처음엔 몰랐다. 돈을 향한 탐욕도 강하다. 파생상품이 얼마나 위험한지 투자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리 없다. 위험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다면 신용불량자에게도 대출 경쟁을 벌일 게 자명하다. 파국은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해답은 감독 기능과 규제의 강화다. 파생상품은 시장 자율에 일임하면 안 된다. 심상치 않은 징조가 보이면 서둘러 막을 수 있도록 정부가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한다. 부실 채권을 바탕으로 부실 파생상품을 양산하는 건 규제로 틀어막아야 한다. 수업료를 치러야 금융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말에 현혹될 일 아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