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처럼 연주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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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07면

화제작 미니시리즈 드라마들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MBC-TV ‘베토벤 바이러스’였다. ‘하얀 거탑’에서 김명민의 연기에 반해버린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달리 풍악을 즐기는 나로서는 음악을 다루기만 해도 그 작품성에 상관없이 감동을 받는다.

이윤정의 TV뒤집기

그건 음악과 관련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며 아무리 애써도 잘하는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어 질투했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늘 신의 특별한 선물을 받은 천재와 그 눈부신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만 주어진 안타까운 범재의 대립이 나온다. 그래서 나 같은 관객들은 애타는 둔재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합창반이나 합주반에서 친구들과 함께 화음을 만들어 가는 매력에 빠졌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이런 음악 드라마에서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조금씩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몰입하게 만든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괴팍한 지휘자 김명민의 캐릭터가 우선 재미있다. 그의 연기에는 유머의 결이 한층 덧씌워져 있다. 구구절절 사연을 지닌 엉성한 실력의 단원들이 좌충우돌하면서 멋진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감동을 예약한다.

김명민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가슴을 열고 관객에게 무엇을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면서 음악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줄 때는 음악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기적 같은 행복감도 전해진다.

하지만 음악 드라마가 안겨주는 가장 큰 감동은 역시 연주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 역의 배우가 아무리 독특한 웃음 소리로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해도, ‘샤인’의 주인공이 신경증을 그럴듯하게 연기했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에서 그들의 실감 나는 연주가 없었더라면 관객은 천재 음악가와 배우를 동일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장근석과 김명민이 연기하는 천재 음악가가 연주하는 장면이 나올 때, ‘저 사람들은 연주자가 아니니까’ 하고 한번 걸러 감안하고 봐야 한다면 아무래도 감동을 주긴 힘들 것이다. 운지법 같은 데서 비교적 성의를 다하고 있는 배우들의 노력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주연 이지아의 바이올린 연주 자세 같은 건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참 어설프다.

연기의 관록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노배우 이순재나 감초배우 박철민의 익살 조연 역시 엉성한 연주 속에서는 빛을 잃었다. 반대로 진짜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나와서 어린 시절의 김명민을 좌절시키는 단 수십 초의 피아노 실연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솟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는 아무나 쉽게 배우던 악기들인데 왜 연기자 중에는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없는지, 혹은 왜 연기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바이엘’이나 ‘체르니’ 정도는 떼도록 가르치지 않는 건지 불평도 하게 되지만 그건 또 연기자들만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연기자들이 최대한 실연에 가까운 모션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완벽함에 욕심내는 연기자가 보고싶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데서는 감정이입을 하기가 힘들 테니 말이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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