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여행서 느끼는 실망과 감사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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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15면

외국을 여행하는 것과 모국을 여행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다르다. 작년 이맘때 취재차 하루 묵은 경남 남해의 어느 특급 리조트에서 나는 이 사실을 실감했다. 특급 호텔보다 더 넓은 방에 짐을 풀고 커튼을 연 순간 병풍처럼 펼쳐진 수려한 남해의 풍광. 뿌듯했다. 보아라, 한국이라고 특급 리조트가 성공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곧 저 멀리 야산에서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잡초를 뜯는 인근 주민들을 보았다. 1년에 한 번꼴로 동남아 호화 리조트에서 샴페인을 물처럼 마시고 선탠을 즐기다 침 흘리며 낮잠 자던 내가 모국의 리조트에서 불의의 감정적 일격을 당한 것이다.

물론 동남아 리조트에도 그 더운 날씨에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현지 주민이 있다. 하지만 큰 감정적 울림이 없었다. 그들은 나와 크게 상관없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남해 야산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주민들은 다르다. 내 친척도 지금 어딘가에서 저런 풍경을 만들고 있을 수 있다. 고생하는 모국인 곁에서 18홀을 돌고 딥 티슈 마사지를 받는 게 조금 면구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그건 바람처럼 스쳐간 싸구려 동정심이지만 잠시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건 사실이었다.

모국을 여행하는 건 있는 그대로의 모국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그랜드 캐년처럼 장대하지도, 피지 섬의 바다 빛깔처럼 로맨틱하지도, 스코틀랜드의 구릉처럼 서정적이지도 않은 한국의 풍광과 물산은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특별함으로 치자면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이다.

한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면 이 나라의 풍경은 왜 이리 심심할까 싶어 한숨 난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어깨를 맞댄 유순한 산들이 사이 좋은 형제처럼 보여 흐뭇해진다. 교토의 반듯반듯한 예쁜 절을 본 사람이라면 허리가 휜 나무를 기둥으로 쓴 부석사가 후줄근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산과 하나 되어 묻히는 가람 배치와 날아갈 것 같은 지붕 아래 아름다운 산하를 품에 안은 안양루의 절묘함은 언제 봐도 놀랍다. 온 나라 구석구석을 조잡한 건물로 덮고 있는 일부 펜션은 할 수 있다면 다 폭파해 버리고 싶다.

하지만 만원짜리 몇 장 들고 찾아가 1980년대 가요를 틀어 놓고 바비큐 먹으며 사람들과 정을 나누다 보면 펜션의 미덕도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모국을 여행하는 건 절실함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리 대단치 않은 모국이여, 그래도 감사하다.”


현직 남성 잡지 기자인 송원석씨는 ‘신사, 좀 노는 오빠, 그냥 남자’를 구분 짓게 하는 ‘매너’의 정체를 파악, 효과적인 정보를 소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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