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해외발 금융위기 파급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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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자. 1929년 뉴욕시장이 대폭락했을 때 미국뿐 아니라 유럽 선진국들이 모두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신흥 시장은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돈줄이 마르니까 선진국들이 신흥 시장에 투자한 돈을 대거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세계경제가 나빠지면 ‘중심부’보다 ‘주변부’가 더 나빠진다는 판단도 여기에 더해졌다.

그러면 이 충격에서 누가 가장 먼저 벗어났는가.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 킨들버거 교수는 일본과 영국이라고 답한다. 일본은 금 수출을 금지하고 금본위제에서 탈퇴했다. 외국환관리법을 도입해 환율을 보호했다. 적자재정을 일으켜 공공투자를 대폭 늘렸다. 당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상은 케인스 경제학을 배운 바 없지만 국제금융시장 불안정에서 일본 경제를 격리시키고 총수요를 늘려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했다. 영국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대신 환평형계정 을 설치해 “환율과 런던금융시장을 핫머니의 표적으로부터 떼어놓았다.” 금리를 떨어뜨려 주택경기를 부양했다.

당시 자본 이동의 주춧돌은 금본위제였다. 투자자들이 돈을 빼내가면 그만큼 금을 내줘야 했다. 이 상황에서 통화가치를 유지하려면 금리를 대폭 올려야 했다. 경기가 나빠지는데 고금리까지 얹어서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과 영국은 이 고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 먼저 끊었다.

지금의 세계경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금의 역할을 미국 달러화가 하고 있을 뿐이다. 서브프라임 위기가 시작되면서 ‘중심부’는 ‘주변부’에서 돈을 빨아들였다. 한국의 경우 지난 1년 동안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에서 빼내간 돈이 50조원을 넘는다.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의 ‘현금인출기’ 역할을 하고 있는 말이 나온 지 오래 되었다. 이번 주에도 미국 은행들이 망했는데 한국 주가가 더 많이 떨어지고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폭락했다.

그래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괜히 정부가 잘못 나섰다가는 ‘투자자 신뢰’가 떨어져 경제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동안 선진국들의 위기관리 능력이 축적되어서 ‘유동성 공급’ ‘협조금리 인하’ 등을 통해 세계경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금리인하 카드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중심부 국가들은 기축통화를 쥐고 있기 때문에 환 투기를 걱정할 필요 없이 금리를 내릴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과 영국은 이미 금리를 내렸고, 미국도 내릴 전망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어렵다. 환율을 방어하려면 오히려 금리를 올리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주변국’에 불과한데 자본시장을 완전히 열어 놓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다. 1930년대 일본과 영국처럼 자본시장 자유화에 대한 맹신만 던져버리면 정책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 중국도 현재 자본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즉각 금리 인하라는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예방조치를 해야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돈을 빼내가게 하고, 빼내가더라도 일부만 갖고 가게 하고, 환 투기도 지금보다 훨씬 어렵게 만드는 긴급 자본통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것이 반드시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주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나쁜 환율로 원화 자산을 달러로 서둘러 바꾸는 것이 이들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외부 충격이 있으면 이를 증폭해 받아들이는 시스템이다. 이 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골병이 든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려면 너무 늦을 수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