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베리아서 밀리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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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월 1일부터 동유럽 8개국과 몰타.키프로스의 가입으로 유럽연합(EU)은 10개국이 늘어난 25개국으로 확대된다.

유럽연합의 확대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동북아에서는 러시아의 에너지자원 이용과 관련해 경제협력 논의가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를 이용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망 건설 논의가 동북아 역내의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 구도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 中.日 에너지 개발 각축

러시아는 에너지자원을 이용해 자국의 동북아 인접지역의 경제발전과 외국투자유치를 꾀하면서 동북아지역으로의 진출에 적극적이다. 미개발 상태의 이 지역 에너지자원 개발을 동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경제발전과 연계해 추진한다는 구상인 것이다.

러시아의 이런 구상에 대한 동북아 지역국가들의 대응도 활발하다. 특히 일본과 중국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일본은 앙가르스크와 나홋카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을 제안하면서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을 약속하는 한편, 일본 간사이(關西)지방 등 낙후지역의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일.러 경제협력의 부진을 에너지 협력 프로그램을 활용해 극복하고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또한 이를 통해 쿠릴열도 남단 4개 섬 문제(일명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해 제로섬 게임을 비제로섬 게임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반면 중국은 접경지역에서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강화보다는 동북아 역내에서의 전략적 제휴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해상운송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즉 중국은 러시아의 에너지자원을 활용해 중.러 양국의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동시에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미.중 관계 또한 강화하면서 국제관계에서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중국의 협력하에 동북아로의 진출을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에너지 자원을 통한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변국들의 움직임 속에서 한국은 현재 큰 전략 없이 일단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을 통해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현재 중.일.러 3국 협력과 각축 속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느낌이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경쟁이 동북아에서의 정치.경제적 협력의 차원을 뛰어 넘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논의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아직 이러한 전략의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한 채 경제적 논의에만 치우치고 있어 안타깝다. 러시아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석학 중 한명인 미 하버드대학의 마셜 골드먼 교수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필자에게 "한국이 동북아 지역 전체의 판을 바꿀 수도 있는 이런 변화에 세밀하고 의욕적인 계획과 노력을 기울여야할 시점"이라며 한국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 변방국가로 전락할 수도

한국은 동북아경제중심 전략을 추진한다면서도 정작 동북아의 큰 틀을 바꾸는 중.일 각축과 러시아의 전략적 대응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 에너지 문제를 매개로 해 협력과 통합의 길을 모색하고 냉전 후 동북아에서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부진한 것이다. 동북아경제중심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이에 대응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다시 일본과 중국의 각축 속에서 에너지와 전략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만 변방국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중심적 플레이어의 위치도 놓치게 될 수 있다. 동북아 허브와 경제중심은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여기에 대한 대응책을 면밀히 수립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권원순 한국외대 교수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