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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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의미했다.
젊디 젊은 소실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기민한 반응에역력히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이젠 멀찌감치 감춰두고 두집살림을 하겠다는 것인가.해외나 지방 출장을 빼고는 도무지 외박이라는 것과 담 싼 남편이었다.자정 이후엔 나다닐 수 없는 소위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었으나 회사 일이나 손님 접대 핑계를 대고 외박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밤 열두시면 꼬박꼬박 귀가했다.아내의 신뢰를 받기에 충분한 생활규칙이었다.그것이 바로함정이었으니….
남편은 골목 어귀에 소실을 살게 하면서 날마다 퇴근길에 들러저녁을 함께 들며 잠자리까지 누리고 귀가하곤 했단 말인가.그래서 「소식(少食)」과 「과로하지 않아야 함」을 애써 강조했던 것인가.저녁을 두번씩이나 들 수도 없거니와 잠자 리도 거푸 치를 수 없는 까닭이다.
외식을 싫어하는 남편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반드시 저녁 상을 차리게 했었다.진작 의심했어야 하는 것인데 「당뇨」라는 바람에 그렇게만 알고 속아온 것이다.
가증스러웠다.동시에 자신이 볼나위없이 초라하여 견디기 어려웠다. 그날 밤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갑자기 부산에 출장갈 일이 생겼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소실과 함께 새 집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화기를 놓으며 결심했다.
-이혼하리라.
결심을 하고나니 오히려 후련했다.
수렁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엄마.』 작은아들이 옆에 와서 물었다.
『머리가 아파?』 거실의 소파에 묻힌 채 두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는 을희더러 혁(爀)은 걱정스레 응석을 부렸다.
중학교 2년생.요즘들어 덩치만 부쩍 자랐지 아직 애티를 벗지못한 여린 아이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했다.
이혼한다는 것은 이 아이를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다.
남편은 작은아들을 유별나게 귀여워했다.딸아이에게나 대하듯 나긋나긋이 굴었다.꽃무늬가 있는 셔츠라거나 분홍색 바지라거나 하는 여자 아이 옷을 사와서 입히고 『아빠에게 뽀뽀』하며 입맞추게 하곤 했었다.
혁은 사실 소녀처럼 해사하고 예뻤다.생김새처럼 맘씨도 곱고 착했다. 남편은 결코 이 아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이 여린 아이를 계모 손에 키우게 할 것인가.희고 가느다란 아들의 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혁이가 아기 때 제일 좋아한 소설이 뭐였더라?』 『소공자.
』 『그래 「소공자」였지….』 을희는 세계 명작에 빗대어 작은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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