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54> 축구장에 물 채울 각오하고 뛰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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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랜 기간, 이렇게 집중적으로 한국 축구가 능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베이징 올림픽 취재팀장을 맡아 현지에 머문 웰컴투풋볼은 한국 축구가 ‘동네북’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유도의 최민호가 첫 금메달을 따내고, 수영·사격·역도 등에서 금메달이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 축구는 카메룬과 비기고, 이탈리아에 0-3으로 참패하며 8강 희망이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 ‘축구장에 물 채워라. 태환이 수영하게’로 시작된 ‘축구장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한국 선수단의 메달이 늘어갈수록 시리즈는 점점 진화됐다. 축구장 시리즈를 네티즌의 ‘댓글 놀이’라며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축구인들은 그 안에 깔린 중요한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국기(國技)’라고 자부했던 축구가 다른 종목과 비교되고 있으며, 축구에 대한 애정이 다른 종목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축구 대표팀이 욕먹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몇 수 아래로 여겼던 베트남과 오만에 참패했던 2003년 오만 쇼크부터 최근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허무 축구’에 이르기까지. 그렇지만 그 비판은 “선수들의 정신력이 해이해졌다”거나 “감독의 용병술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대표팀의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애정과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은 올림픽팀의 무기력한 경기를 계기로 축구의 인기가 어느 정도 부풀려져 있었는지, 선수들이 얼마나 실력 이상의 대접을 받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들을 ‘황태자’로 착각하는 선수들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 버렸다.

대한축구협회의 올해 예산은 700억원이 넘는다. 연령별 남녀 대표선수들은 호텔급 시설을 갖춘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의 융단 같은 천연잔디에서 훈련한다. 축구협회는 대표팀이 나이키 유니폼을 입어주는 대가로 나이키로부터 4년에 490억원(현금+현물)을 받는다. 그것도 모자라 트레이닝복에 KT/KTF 로고를 달게 해주고 한 해 34억원을 챙긴다. 축구협회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후원금은 해당 기업체의 제품 가격에 고스란히 얹힌다. 따라서 축구협회에 들어가는 돈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 봐도 된다. 그런데 이제 국민은 ‘내 돈’이 축구보다 핸드볼이나 역도의 육성에 쓰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축구협회는 강 건너 불구경 하고 있는 인상이다. 협회는 ‘대책회의’라는 걸 만들었지만 대책이란 것도 지도자 육성, 연령별 상비군 운영 등 그동안 나왔던 것들을 다시 엮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한국 축구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위기를 맞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마저 탈락한다면 한국 축구에는 ‘핵 겨울’이 닥칠 것이다. 축구인들이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축구장이 수영장으로 바뀔 날이 올 수도 있다.

정영재 기자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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