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페그제’의 빛과 그림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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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31면

홍콩의 환율은 미국 1달러에 7.75~7.85홍콩달러로 사실상 고정돼 있다. 홍콩이 자국 화폐 가치를 미 달러에 묶어 환율을 적용하는 ‘페그제(Peg System)’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환율 정책은 금융통화 정책의 주권을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에 위임해 놓은 셈이다. 홍콩은 페그제를 1983년 도입했다.

홍콩은 페그제를 채택한 나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안정성을 보여줬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97년에도 홍콩 페그제는 사수됐다. 이듬해 국제 환 투기 세력이 홍콩 페그제를 흔들기 위해 홍콩달러 가치 급락에 베팅했지만 실패했다. 홍콩 정부가 미 달러를 쏟아 부어 방어해 냈다. 덕분에 월마트 같은 글로벌 기업이 아시아 거점을 홍콩에 두고 있다. 그 결과 일자리가 창출돼 탄탄한 경제흐름을 자랑한다.

최근 홍콩 페그제가 다시 위협받고 있다. 지난 7월 물가상승률이 무려 6.3%에 달했다. 지난 한 해 인플레이션은 2% 정도였다.

홍콩 당국자는 “이렇게 물가가 급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물가가 오르면 홍콩달러 가치가 떨어져 환율을 7.75~7.85홍콩달러 선에서 유지하기 힘들다. 환율이 오를 수밖에 없다.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홍콩 정부가 미 달러를 팔아 홍콩달러를 사들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홍콩 실물경제의 앞날도 밝지 않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가 사실상 침체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주가 폭락에다 올림픽 이후 경기침체 걱정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미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현재 2%에서 올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럴 경우 홍콩의 유동성도 줄어든다.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긴축을 하게 되는 셈이다. 거품 양상을 보이다 주춤하고 있는 집값이 곤두박질하면서 홍콩 전체의 경기가 빠르게 식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미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홍콩의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각해진다. 금융정책 주권을 쥐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은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하는 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 국가들도 비슷한 처지다. 미 중앙은행이 지난해 9월 이후 기준금리를 3.25%포인트 인하하자 걸프 지역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걸프 지역 나라들이 페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지난달 권고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는 경제학자들이 페그제 폐지를 정식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홍콩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페그제를 폐지하면 안정성에 끌려 들어온 글로벌 기업들을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당장 페그제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페그제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90년대 말에는 미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는 바람에 홍콩은 저성장·고실업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미국의 저금리 정책 때문에 인플레이션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요즘 홍콩은 조지 소로스 같은 환 투기 세력을 스스로 끌어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90년대 초반 영국과 96년 태국이 각각 경제 체력에 맞지 않게 자국 통화 가치를 높게 유지하는 바람에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홍콩의 페그제가 외환시장 안정 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에 비춰 볼 때 페그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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