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의 추억, 바닥의 교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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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28면

역사는 분명 반복되는 모양이다. 5년·10년 전, 그리고 20년 전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이 요즘 금융시장에서 똑같이 연출되고 있다. 시장의 패닉과 위기설, 그리고 정부와 업계의 대응이 바로 그렇다. 주식이나 펀드 투자로 시장과 호흡을 함께해온 투자자라면 과거의 씁쓸했던 추억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보자.

#속절없는 주가 하락에도 인내심 하나로 버텼던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름하여 ‘위기설’이다. 금방이라도 경제가 결딴나고 시장이 붕괴할 듯한 공포심이 나를 괴롭힌다. 금융시장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급기야 일간 신문과 방송 뉴스의 톱 뉴스로까지 올랐다. 언론은 연일 금융시장 상황을 헤드라인으로 보도한다. 일부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루머가 증시를 떠돈다. 정부 관료들이 뉴스에 등장한다. 경제의 펀더멘털에 이상이 없으니 투자자들은 동요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아울러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세력을 색출해 엄단하겠다고 경고한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사장들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하는 모습도 보인다. 시장이 그렇게 나쁠 이유가 없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그러고는 정부에 대해 시장 활성화를 위해 증권 거래 관련 세금을 깎아 주고 비과세 증권저축 상품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증시를 안정시키기 위한 구급요원으로 긴급 투입된다.

약 20년 전인 1989년 주가지수 1000포인트 달성 뒤 닥친 주가폭락 사태 당시, 10년 전 외환위기 때, 5년 전 카드대란 때 등에서 위와 같은 일은 판박이처럼 반복됐다. 그 뒤 시장은 과연 어떻게 움직였는가. 크게 봤을 때 이런 장면이 전개됐을 때 시장은 바닥권을 형성했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물론 단번에 시장이 호전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꽤 걸렸다. 증권사 사장들의 긴급 회동은 수차례 더 반복됐고, 정부의 위기 진화노력도 상당 기간 계속됐다.

이제 그 당시 당신의 선택은 어땠는지 되돌아보자. 끝내 공포심을 견디지 못해 주식 매도와 펀드 환매로 대응했던 당신, 또는 눈 딱 감고 고난의 행군을 선택했던 당신, 그리고 현금화했던 자산을 다시 시장에 넣었던 당신, 그 뒤 결과는 어떠했는가.
시장을 떠났던 사람들은 “좋아지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이미 크게 상처받은 마음은 상당 기간 시장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결국 시장이 다시 후끈 달아오른 상투권이 돼서야 시장에 복귀했다. 그러곤 또다시 상처를 입고 시장을 떠나야 했다.

끝까지 버텼던 사람들은 결국 값진 결실을 맺었다. 물론 우량 주식과 우량 펀드를 갖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얘기다. 시장과 호흡을 같이했기에 이들은 시장이 바닥을 본격 탈출할 때 신규 자금을 더 투입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도 투자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고난의 장면이 몇 번이고 더 연출될 것이다. 경기하강이 이어지면서 중견·중소기업들의 자금 악화설이 반복될 공산이 크다. 일부 투자자의 시장 이탈로 펀드 환매가 일어날 수도 있다. 지난해 10월이 한국 및 중국 증시의 대세 고점으로 펀드투자가 절정을 이뤘던 점을 감안하면 꼭 1년 뒤인 다음 달이 부담스럽다. 1년이나 기다렸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일부 투자자들이 환매 대열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 해외 쪽에선 미국의 세금환급 약발이 소멸하면서 하반기 중 경기지표가 다시 나빠지는 ‘더블 딥(2중 침체)’도 예상된다.

당장 이번 주에도 만만치 않은 이벤트들이 대기 중이다. 한국은행이 금통위 회의를 열어 기준금리의 인상 여부를 논의한다. 9월 경제대란설의 빌미가 됐던 국고채 만기일과 선물·옵션의 동시 만기일인 ‘쿼드러플 위칭데이’도 버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을 거치며 시장은 바닥을 다지고 체력을 보강해 나갈 것이다. 지금부터 1∼2년 정도는 눈앞의 장면에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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