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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구장, 그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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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주 청와대 오찬에 초청받았을 때 김경문 감독은 여전히 어깨가 무거웠을 터다. 대통령과 한자리에서 식사하면서 기회를 보느라 밥이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사려 깊은 그가 옆자리 다른 종목 선수들을 배려하느라 식사가 끝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절망감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승부수를 띄울 때마다 척척 들어맞던 전승(全勝) 감독 아닌가. 끝내 대통령 옆자리에서 사진 찍는 기회를 만든 뒤 회심의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근사한 돔 구장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하지만 김 감독의 청와대 승부수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통령은 말없이 미소로만 답했다고 한다. 사실 승패 가르기는 무의미하다. 두 사람은 서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김 감독은 꿈을 이뤄줄 힘이 있는 사람에게 야구인들의 숙원을 전달했고 대통령은 그보다 급한 일이 많음을 넌지시 알렸다. 굳이 편을 들자면 대통령이 옳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야구팬이고, 김 감독이 박철순 투수와 호흡을 맞출 때부터 그의 팬이었으며, 대학시절 클럽팀을 만들어 야구를 즐겼던 동호인이지만 달리 마음먹기 어렵다.

대통령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는지 모르겠다. 서울시장 시절 돔 구장 건설 약속도 했던 그였다. 강남에 복합스포츠타운으로서 돔 구장을 만든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언급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울시장으로서의 생각이고 대통령의 생각은 달라야 하는 게 맞다. 시정과 국정이 어찌 같겠나 말이다.

사실 돔 구장 건설 이슈는 늘 정치적 색채를 띠어왔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어지러운 대회규정 탓에 우리 야구가 우승 같은 4강을 했을 때도 돔 구장 얘기가 나왔었다. 거기에도 역시 정치권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KBO 총재가 비난 여론을 잠재우고자 하던 속사정이 있었다. 이처럼 돔 구장 건설에 정치논리가 끼어드는 건 그 효용성과 경제성에 비해 건설 비용이 워낙 큰 탓이다. 구장을 짓는 데만 8000억원이 든다는 거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다는 인천 문학구장을 5~6개 지을 수 있는 비용이다. 게다가 유지비도 엄청나다. 1년치 운영비용이면 어지간한 야구장 하나는 지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돔 구장의 장점도 많은데 단점만 트집 잡는 건 옳지 못하다. 하지만 잠실구장만 해도 이미 심각하게 낡았고 지방 구장들은 아예 붕괴위험마저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돔 구장 건설을 얘기하는 건 아무래도 앞뒤가 바뀌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음을 이승엽 선수가 일깨우지 않았나. “고교야구팀이 60개밖에 없는 나라가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던 탄식 아닌 탄식 말이다. “일본의 고교팀 수를 4100여 개(등록팀 수 4163개)라고 하면 안 된다. 한국은 그 마지막 두 자리 수보다 적지 않으냐”는 일본 야구계의 우스개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남에게 으스대기 위한 미래를 꿈꾸기 앞서 60개밖에 없는 고교야구조차 마땅히 운동할 데를 못 찾는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돔 구장을 지을 비용이면 소규모 조립식 관중석을 갖춘 잔디구장 수백 개를 지을 수 있다. 그중 10분의 1만 있어도 초·중·고교 선수들이 맨땅에 주전자 물로 줄 그어가며 야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올림픽 금메달로 관심 높아진 꿈나무들이 실망해서 돌아서지 않아도 될 터다. 그런 때가 되면 정말 돔 구장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높은 국내 프로야구의 흥행 수준, 관중 동원력이 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자원이 한정된 만큼 언제나 선택의 문제다. 보여주는 구장이냐, 뛸 수 있는 구장이냐 사이의 선택이다. 김성근 SK 감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내에 제대로 된 야구장이 열 개도 안 된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남해까지 가서 야구를 한다.” 나는 김성근 식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지적엔 절대 동감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