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배심제 도입 신중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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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법개혁위원회는 최근 '국민의 사법참여'를 주제로 공청회를 개최했다. 논의의 초점은 일반 시민들이 직업법관으로부터 독립해 유무죄를 결정하는 영.미식 배심제를 도입할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이 직업법관과 함께 재판을 진행하는 독일식 참심제를 도입할 것인지에 있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참심제의 경우에는 우리나라 군사재판에서 이미 일부 시행되고 있다.

*** '유전무죄' 위험 대비를

국민의 사법참여는 재판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국민이 공적인 문제에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할 기회를 갖게 한다. 이런 과정에 직접 참여해 본 국민은 민주시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되므로, 사법 시스템과 국민의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등 여러 모로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이는 곧 부패한 정치인들이 철수 엄마, 영희 엄마 같은 우리 옆집의 평범한 아주머니들로부터 재판받는 날이 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 뉴욕주 지방검찰청 검사로 일하면서 배심재판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배심제도가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귀한 보루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편, 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배심제도는 재판이 자칫하면 한편의 드라마같이 진행되기 쉬우며 감정에 치우쳐 사실이 왜곡될 우려가 크다는 점과, O J 심슨같이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유리해 미국판 '유전무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로 비판받는다. 이 때문에 돈 없는 피고인들이라고 해서 재판에서 불리하지 않도록 뉴욕주의 경우 막대한 예산을 들여 검찰조직에 맞먹는 국선변호인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사건의 5% 정도만 배심을 통하고 있고, 나머지 형사사건의 경우 유죄협상절차(Plea Bargaining)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이 제도 역시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피고인들의 인권보호에서는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가 배심제를 도입하더라도, 배심에 의하지 않는 나머지 사건에 함부로 미국식 유죄협상절차를 도입하게 되면 지금보다 오히려 시민에게 더 불리한 제도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배심제도의 도입이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 인력의 근본적인 역할 변화와 재정부담, 재판 적체 감수 등을 필요로 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배심제도가 성공적으로 도입되기 위해서는 심리절차나 절차법.증거법의 과감한 개혁이 전제돼야 한다. 왜냐하면 배심재판은 우리나라에서 관행화된 서류 중심의 심리와 달리 그 성격상 구두변론을 통한 집중심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미국 법정의 증언 대부분은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데 반해, 우리나라 법정에서 이뤄지는 증언의 상당부분은 미국에서 금지된 사실상 유도신문을 통해 이뤄지는 것도 개선해야 할 과제다. 배심원들의 진실 발견을 방해하는 위증, 증언 거부 등 사법방해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도 필수적이다.

*** 심리절차 등 과감히 고쳐야

배심제도의 핵심은 배심원의 중립성과 공공성이다. 배심원들이 언론보도, 인맥, 외부의 압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법원은 철저히 보호해야 하며,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모든 세력에 대해서는 형사적으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한 배심원이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심리가 끝날 때까지 직장이나 생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그 직장을 보장할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이러한 재정적.사회적 비용 부담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배심제도의 도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도 위험하다. 배심제도는 국민 참여의 한 가지 방안일 뿐이며, 그 도입에 있어서도 효과와 비용을 철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원재천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교수 전 뉴욕주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