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51. 빛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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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노랫말을 지은 ‘잘 살아보세’를 작곡한 김희조씨

요즘 젊은이들은 나를 잘 모른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물으면 40대 이상은 대개 고개를 끄덕인다.

1962년 어느날, 음악평론가 이상만씨가 찾아와 "혁명 1주년을 맞아 장충체육관에서 민족예술제를 개최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큰 노래 하나 지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거리에 시인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왜 나한테 그런 소릴?"

"위에서 선생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위가 누구요?"

"공화당 김종필 총재입니다."

뭐? 항상 박정희 장군 뒤에 딱 버티고 서 있는 의문의 사나이. 사람들은 그가 모든 것을 꾸미는 모사(謀士)가 아니냐며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내 가슴이 살며시 달아올랐다. 철학을 달라는 이야기인가. 지금 국민은 당신들을 보고 있다. 어디로 끌고가는가 불안에 떨고 있다. 한번 외쳐볼라나?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보따리를 팽개치자고. '잘 살아보세'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금수나 강산 어여쁜 나라/한마음으로 가꾸어가면/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부귀영화도 우리 것이다/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1절) 일을 해보세 일을 해보세/우리도 한번 일을 해보세/대양 너머에 잘 사는 나라/하루 아침에 이루어졌나/티끌을 모아 태산이라면/우리의 피땀 아낄까 보냐/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2절) 뛰어가 보세 뛰어가 보세/우리도 한번 뛰어가 보세/굳게 닫혔던 나라의 정문/세계를 향해 활짝 열어/좋은 일일랑 모조리 배워/뒤질까 보냐 뛰어가 보세/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3절)."

이상만씨는 처음부터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하다 공화당에 들어간 신동준.호현찬씨와 상의하고 주로 민요를 다뤄온 경희대 김희조 교수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단서를 붙였다. "민요 가락 냄새를 풍기면서 서양 음악의 웅대함도 조화시켜 주세요."

가수는 서울대 음대의 베이스인 이인영 교수와 연세대의 소프라노 황영금 교수가 맡았다. 두 사람 다 일본의 명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출신으로 당대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뛰어난 노래를 뒷받침하는 대규모 합창단의 목소리로 장충체육관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다음날부터 방송은 아침저녁으로 이 노래를 틀었다. 70년께 재계 거물들이 새마을 연수교육을 며칠씩 받았다. 거기 다녀온 구평회가 호들갑을 떨었다.

"야, 처음부터 잘 살아보세를 가르쳐주더라. 야단이 났다. 신나더라!"

어느날 그는 해외출장을 간 큰 형님의 전용 벤츠가 쉬고 있으니 부인들과 함께 동해안이나 한바퀴 돌고 오자고 했다. 춘천에서 날이 저물어 관광호텔에 묵었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야, 운사. 창문 열고 들어봐라! 천지가 시끄럽다."

춘천 하늘에 퍼져나가는 스피커의 '잘 살아보세'.

그래! 그렇게 가보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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