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분에 시작해 39분에 끝...네 배우의 139가지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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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10면

연극 ‘39계단’
10월 12(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평일 오후 7시39분, 토 오후 2시39분·7시39분
일 오후 2시39분(월 쉼)
문의 02-2250-5900

“웃을 준비가 되셨습니까?”라는 사인을 연극 ‘39계단’은 “창문 블라인드를 걷어보자”며 보낸다. 배우가 끌어당기는 것은 스케치북만한 크기의 흰 천. 이게 걸린 받침대가 창문이라는 ‘코드’가 전달되면 성공이다. 창 밖 추격자들은 무대에 가로등을 들고 등장해 웃음을 자아낸다. 자, 이제 신나게 달려 보자. 네 개의 트렁크는 열차 객실로 둔갑하고, 여닫이 문이 달린 틀을 이리저리 옮겨놓는 것만으로 구중(九重) 저택이 암시된다. ‘개그 콘서트’ 식의 기발한 ‘웃음 코드’다.

연극 ‘39계단’은 존 버컨의 동명 소설을 옮긴 것이지만, 우리에겐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39계단’으로 낯이 익다. 주인공 리처드 해니(이원재)가 스파이 조직에 쫓기는 여인과 우연히 얽혔다가 살인범으로 몰려 쫓기는 이야기다. 영화는 기묘한 스파이 스릴러물이건만 무대는 마임과 슬랩스틱의 향연이다. 트렁크 위에서 코트 뒷자락을 양손으로 펄럭이며 ‘지금 기차 지붕 위’라고 암시하는 식이다. 간단한 소품과 무대장치만으로 영화 못잖은 역동성을 과시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멀티맨의 활약. 제작진은 “139가지 역할을 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고 강조하지만, 실제론 역할 가짓수가 아니라 변환하는 차례 수다. 모자를 바꿔 쓰는 것만으로 신문팔이·외판원·경찰관을 동시에 연기한다. 몸의 반쪽은 여관 주인, 다른 반쪽은 수사관을 연기하기도 한다.

‘미스터 메모리’를 포함해 수십 가지 캐릭터를 연기하는 권근용씨는 “초를 다퉈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에 무대 뒤에 도우미가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뮤지컬 앙상블 출신으로 정극 연기가 처음인 권씨는 탄탄한 마임으로 다중 캐릭터를 깔끔히 소화했다. 캐롤라인 레슬리·토비 세드윅 등 협력 연출을 위해 내한한 해외 연출팀의 눈에 띄어 오디션에서 발탁됐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인기 공연 중인 ‘39계단’은 올 토니상에서 음향상과 조명상을 받았다. 영문 공연에선 히치콕 영화에서 빠져나온 듯한 영국식 악센트가 묘미인데, 한국어로 옮기니 그 맛이 뚝 사라져버렸다. 결국 승부는 톱니바퀴 타이밍에서 찾아야 할 텐데 아직은 헐거운 편. ‘오차 0’의 움직임에서 터져야 할 웃음이 엉뚱한 슬랩스틱으로 조장될 땐 아쉽다.

공연 시간을 체크할 것. 오후 2시39분과 7시39분에 시작한다. ‘39계단’이란 제목에서 착안한 시도다. 휴식 시간 포함해 두 시간 공연이 끝나면 분침은 39분을 가리킨다. 기자가 봤을 땐 배우들 호흡이 살짝 빨랐는지 38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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