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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흔들리는 과학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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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가 지난 수십년간 국제 수준에 맞추어 급속히 발전했지만, 이러한 추세를 따라오지 못한 분야 중 하나가 교육일 것이다. 심지어 교육의 질이 과거에 비해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같은 한국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국내에서 학생들의 입시 지옥과 사교육 질곡(桎梏)을 같이 견디는 부모뿐 아니라 객관적인 외국인의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국제경영연구원(IMD)은 한국의 교육 관련 경쟁력을 세계에서 30~40위권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어 전체적인 국가경쟁력이나 경제 발전도에 비해 낙후돼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2003년도 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의 '의무교육과정에서 과학 교육의 적절성'과 '젊은이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라는 항목에서 각각 40위, 48위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한 과학기술 교육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 담당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하고 제도를 개편해 종종 문제를 악화시키곤 한다. 예를 들어 제7차 교육과정을 적용한 내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는 인문계열 수학인 '나'형을 택하고도 이공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돼 있는데, 많은 전문가가 우려하던 대로 모의 수능을 실시해 본 결과 학생들의 67%가 '나'형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탐구영역에서도 현대 과학적 탐구능력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는 인기 없는 과목이었고, 특히 물리 II를 선택한 학생은 전체의 5%에 불과했다. 이처럼 수학과 과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학생이 줄어드는 것은 이공계 교육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다. 여기에 학생 모집에 급급한 대학의 현실이 겹치면서 앞으로는 미적분을 모르고 이공계 학과에 진학하며, 뉴턴 역학을 안 배우고 기계공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속출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이공계 대학 교육의 질적 저하는 가속화하고, 산업현장에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는 취지는 이해할 만하며, 백화점식 지식의 주입보다 한두 과목에서 원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필수적인 지식 전수를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희생시켜서는 안 되며, 과목 간의 기계적인 평등을 위해 기본이 되는 과목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중.고교 교육이 대학입시 준비 위주로 이루어져 시험에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 반복해 학습하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학습 과목 수를 줄여주는 것이 선진국처럼 학생들에게 흥미있는 과목을 깊게 탐구하는 기회를 주기보다 오히려 폭넓은 지식 습득의 기회를 빼앗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일 대학들이 학생 선발의 완전 자율권을 가지고 있다면 나름대로 깊게 공부한 학생들을 뽑는 방법을 개발해 이러한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입학 전형의 규제는 풀지 않으면서 고교 교육과정만 선진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기대하는 효과 대신 부작용만 커지는 것이다.

물론 과학교육 활성화의 근본적인 대책은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이 이공계 진학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이나 장래 전망이 아니라 어려운 전공 공부인 것으로 나타났듯이, 중.고교 과학교과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개선하면 학생들이 많이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노력과 함께 설익은 제도 개편으로 과학교육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막는 일도 시급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이공계 대학 입시에 수리영역 '가'형을 지정하거나 가산점을 주도록 교육부가 권고하기로 했다지만, 임시방편적 방법보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