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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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여사 어머니인 무당은 말꼬리를 흐렸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아이 몸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요.어려서부터강한 직감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참을성도 많은 편이지만 좌절하거나 병을 앓거나 하면 나팔꽃 새순 허리처럼 연약하게 부러져서영 헤어나질 못하는 체질입니다.그러다가 사윈 재 속 에서 새 불꽃이 되어 피어오르기도 하는 신명같은 것을 지녔어요.접신(接神)하기 쉬운 여자지요.혹시라도 에미를 만나면 에미가 걷던 길에 끌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습니다.그런데 부인께서는 어떻게 그 아이를 아십니까?』 노무당은 비로소 궁금함을 보였다.좀처럼자기 생각을 내비치지 않는 여인이다.
『가정주부를 위한 문화강좌에서 만나뵈었지요.친구처럼 동생처럼대해 주셨습니다.』 -주셨습니다? 왜 과거형의 말투인가? 아리영은 스스로에게 물으며 오직 「아버지 애인으로서의 정길례여사」로 여겨 왔음을 깨달았다.또한 두사람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새삼 깨닫고 쓸쓸했다.
이 노무당에게 아버지와 정여사의 앞날에 대해 무꾸리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다시 두사람을 맺어주는 양벽부(禳피符)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야말로 얼마나 놀랄까.
아버지나 정여사나,아리영이나 우변호사나… 모두 턱없이 어리석고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그 사실을 무당 앞에서 인식하게 된 것이 얄궂었다.
아리영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무꾸리를 단념한채 정길례여사 때문에 온 것처럼 굴었다.
『크게 염려되는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따님께서는 요즘 병중이십니다.지난해 아기를 유산하신 후로 건강이 전같지 않으신 것같아요.』 한의원 사위집에 가서 요양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도쿄로 오기 바로 전에 그녀를 만난 얘기도 전했다.
노무당은 충격을 받는 듯했다.
『한의원이라면…행여 서대문서 한약방 차리던 댁은 아닐 테지요?』 『네,맞습니다.그 댁 마님의 친정 조카되시는 분이 바로 손녀따님의 서랑(壻郎)이시지요.』 그녀의 단단한 몸이 흔들렸다. 『그 여자의!』 수도한 무당답지 않게 처절한 그 외마디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같았다.
남편과 관계있는 여자가 아닌 한 이런 성색(聲色)으로 남의 여인을 부르지 않는 법이다.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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