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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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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선 청년 김산(1905∼38)의 삶을 우리가 기억하는 건 오롯이 미국 여성 님 웨일스의 덕이다. 1937년의 중국 옌안(延安)은 1만2000㎞의 대장정을 마친 중국 공산당의 혁명 거점이었다. 웨일스는 서양 언론 특파원으로 국민당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옌안에 들어간 에드거 스노의 부인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인터뷰한 스노가 마오와 그의 동지들을 주제로 한 역작 『중국의 붉은 별』을 펴냈다면 웨일스는 옌안에서 만난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아리랑』을 남겼다.

웨일스가 본 김산은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지닌 순수한 인도주의자요, 더없이 고귀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의지와 사려 깊은 행동거지, 뜨거운 가슴과 찬 이성을 두루 지닌 ‘전인격체’로 본 것이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을 묘사하기에 ‘파란만장’이란 상투어는 턱없이 부족했다. 열다섯에 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고 700리 길을 걸어 도착한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운동가로서의 기본 소양을 다진 그의 활동무대는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옌안 등 중국 대륙 전역으로 뻗쳤다. 안창호, 김원봉, 이동휘 등에게 배우고 의열단원들과 고락을 같이했으며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심취했던 그는 많은 항일투사들이 그랬듯 중국 공산당과의 연대투쟁에 조국의 운명을 걸었다. 그의 목표는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독립군을 규합한 뒤 한반도 진공작전을 펼쳐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산도 비극적 운명에서 비켜나지 못했다. 38년 일제의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중국 당국에 처형당한 것이다. 조직 보호를 위해 한동안 출판을 미뤄달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웨일스는 41년에 들어서야 미국에서 『아리랑』을 펴냈다.

정작 조국에서 김산은 오랜 세월 금기의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84년 뒤늦게 번역 출판된 『아리랑』이 대학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이내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정부가 3년 전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엊그제 건국 60주년 기념식에 중국에 사는 외아들을 초청함으로써 뒤늦은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조국의 오늘을 있게 한 항일투사들을 기리기에 앞서 좌·우로 이념을 따져 차등을 두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생전의 김산은 “조국을 생각할라치면 우리의 가슴은 미래로 치달렸다”고 구술한 애국자였다. 우리가 환희와 축복 속에 건국 6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건 차디찬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이름없이 숨져간 수많은 김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