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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후 런던올림픽과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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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며칠 있으면 올림픽 드라마도 끝난다. 그렇다면 2008년엔 이제 무슨 드라마가 남아 있을까. 앞으로 10일 후엔 오바마가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한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오는 11월 4일 인류사상 가장 극적인 흑백대결이 펼쳐진다.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45년 만에 인류는 과연 세계 최강국가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지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며칠 전 갤럽조사에서 오바마와 매케인은 44% 대 44%였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인류는 또 하나의 드라마를 보았다. 그것은 노예-파월-라이스 그리고 오바마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1790년대 초 수백 명의 흑인 노예가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짓는 공사에 동원됐다. 흑인들은 동물 같은 대우를 받았고 노동 대가는 모두 주인에게 지급됐다. 이런 사실은 오랫동안 음지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 2000년 7월 미 재무부가 건축 당시 노예 소유주들에게 지급한 약속어음이 발견된 것이다. 백악관과 의사당은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인권을 상징한다. 매년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이 찾는다. 그런 건물들이 흑인 노예의 피와 땀으로 지어졌다니…. 백인에게나 흑인에게나 듣고 싶지 않은 충격이었다.

백악관 공사로부터 140여 년이 지난 1937년 뉴욕의 빈민가. 자메이카 출신 이민 가정에서 콜린 파월이 태어났다. 가난한 파월은 일하면서 공부했다. 파월은 성실 하나로 역경을 헤쳐 나갔다. 어느 해 여름 그는 콜라 공장에서 인부들이 바닥에 흘린 콜라를 닦는 일을 맡았는데 이듬해엔 병에 콜라를 넣는 일을 했다. 4성 장군 파월은 91년 합참의장으로 걸프전 승리의 영웅이 되었다. 파월은 93년 퇴역했는데 국민적 인기는 날로 커져만 갔다. 96년 대선을 앞둔 95년 파월은 여론조사 1위였다. 세상은 파월을 쳐다봤지만 파월은 그해 11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파월은 흑인의 한계를 냉철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여론조사 1위라지만 막상 공화당 경선이 시작되면 이길 수 없으리라 믿었다. 파월의 부인 앨머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부 앨라배마 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대선에 나설 경우 테러를 당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며칠 전엔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 라빈 총리가 극우파 유대인 청년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 대신 파월은 2001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국무장관이 되었다.

파월이 뉴욕에서 태어난 지 17년 후인 54년 미국 앨라배마의 버닝햄. 흑인 목사 가정에서 콘돌리자 라이스가 태어난다. 그녀가 8살이 된 62년 9월 어느 일요일 아침 시내 흑인교회에서 폭탄이 터졌다. 극렬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교회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이다. 흑인 소녀 네 명이 숨졌고 라이스의 친구 맥네어도 들어 있었다. 폭탄이 터진 후 51년 만인 2005년 라이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 국무장관이 되었다.

 라이스가 버닝햄에서 태어난 지 9년 후인 61년 미국 하와이. 케냐 출신 유학생과 백인 여학생 부부가 오바마를 낳았다. 초등학교 시절 오바마의 반에는 흑인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백인 아이들은 오바마에게 “여자친구니까 키스해”라고 놀렸다. 피부색은 오바마를 괴롭혔다. 고교를 다니면서 오바마는 술·담배에다 마리화나까지 입에 댔다. 그랬던 오바마가 지금 백악관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흑인 노예들이 고통 속에서 백악관을 지은 지 200여 년 만에 흑인의 후예가 그 ‘노예의 성’에 가까이 서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탄을 걱정했던 파월과 백인 우월주의자의 폭탄에 친구를 잃은 라이스를 넘어 오바마가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4년 후 올림픽은 런던에서 열린다. 자신의 아프리카 선조들을 쇠사슬로 묶어 미 대륙으로 끌고 왔던 유럽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오바마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개막식을 지켜볼 수 있을까.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