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마법학교 ‘호그와트’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이 수업에 없는 것 세 가지. 먼저 선생님이 없다. 아니 있긴 하되 가르치질 않는다. 수업을 이끄는 미술 TA(Teaching Artist)는 이렇게 제시할 뿐이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색종이로 그 이미지를 표현해 보세요.” 어떻게 만들라는 지시도 없고, 왜 하는지 설명도 없다. 그저 공작하는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가위질을 한다.
뉴욕 링컨센터 예술교육 워크숍 참가해 보니
교과서도 없다. 그래도 수업은 척척 진행된다. 미술관 전시회를 보고 난 뒤 지도교사는 그 주제에 관련된 신문기사와 화집, 영상자료들을 소개한다. ‘학생’들은 각자 흥미를 끄는 자료를 골라 요약하고 추가 정보를 더 조사해서 공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 정답이 없다. 하기야 어떤 예술에 정답이 있을까. 오직 끝없는 토론이 있다. 예술작품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주고 생각의 촉수를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게 돕는다. 호그와트의 마법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함이지만 이곳에서 배우는 주문은 내 안의 시인·화가·음악가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주문의 키워드는 ‘호기심’이다.
정답은 없다, 질문의 파워
“배경음악은 빌리 홀리데이의 ‘글루미 선데이’다.” “무용수의 동작에 각짐과 구부러짐이 섞여 있다.” “공간을 활용할 때 수평과 수직이 교차한다.”지난달 18일 뉴욕 링컨센터 부속 강의실. 링컨센터 인스티튜트(LCI)의 ‘예술교육 워크숍’ 입문 과정 마지막 날이다. 이날은 5분간의 짧은 무용 시범을 보고 수업이 진행됐다. 먼저 각자 무엇을 보았나 하는 묘사가 이어졌다.
제한은 없다. “음악이 끝나고도 얼마간 동작이 더 이어지더라” 같은 묘사도 나온다. 다음은 질문이다. “이 무용은 무슨 장르일까?” “배경음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뒤로 갈수록 긴장되는 느낌은 나만 느꼈나?” 등 두서없이 터진다. 대답은 없다. 담당 TA는 질문들을 빼곡히 칠판에 적어갈 뿐이다.
7월 13일부터 18일까지 닷새간의 워크숍은 날마다 이렇게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촘촘한 일정에 맞춰 미술과 음악, 무용을 번갈아 경험했다. 작품 묘사와 무작위 질문 다음엔 작품의 컨텍스트를 조사한다. 감상에서 다른 작품 창작에 이르기까지 TA는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더 말해보세요(Tell me more)” “다른 생각은(any other idea)?” “모두 동의하나요(All of you agree with that)?”
40명의 워크숍 참가자들은 현직 교사들이 대다수다. 교육행정가·교수·예술가·도서관 사서 등도 있다. LCI 예술교육 워크숍은 이런 교사 혹은 예술·행정가들에게 ‘예술과 교육을 현장에서 접목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TA에게서 ‘해답’을 배우지 않는다. 스스로 학생이 되어 예술교육을 경험할 뿐이다. 난상토론을 통해 스스로가 그 답을 찾는다. ‘예술작품을 대할 때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게 하라’가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무용 교사 마릴린은 “질문은 감상할 때 저항감을 없애준다”며 “미술사·음악사 위주로 이뤄지는 공교육이 놓쳐온 방식”이라고 평했다.
‘창작과 감상’ 깜짝 연결 놀라워
난상토론을 정돈된 ‘탐구의 길(Line of inquiry)’로 이끌어가기 위해선 전체 수업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LCI 워크숍은 전체가 한 편의 잘 짜인 시나리오다. 핵심은 창작과 감상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것. 그것을 수용자가 의식하지 못하게 엮어내는 ‘나사 커리큘럼(Spiral Curriculum)’이 이곳의 강점이다.
‘나사 커리큘럼’은 감상자가 예술 작품을 적극 체험하게끔 설계된다.
미술 수업의 경우 참가자들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기획 전시 중인 ‘루이스 부르주아 회고전’을 두 차례 감상했다. 스스로 아버지·어머니의 이미지를 종이 인형으로 만들어보기도 했다. 미술 TA 바버라 엘만은 워크숍 말미에 이르러 “부르주아의 작품은 가족 관계의 내적 갈등이 주요 모티브”라며 “스스로 상징을 제작해 보고 예술가의 개인사를 조사해봄으로써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게끔 수업안을 짰다”고 밝혔다.
감상은 다시 창작으로 이어진다. 멕시코의 전통음악 ‘판당고(Fandango)’를 모티브로 한 음악수업에서, 참가자들은 밴드 공연을 관람하고 멕시코 음악의 세계화 과정을 일별한 뒤 팀별로 그들만의 ‘다문화 음악’을 발표했다. 한 참석자는 “어느 순간, ‘아하(a-ha)’ 하는 때가 있었다. 이 ‘아하 순간(A-ha moment)’이 작품을 새롭게 경험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워크숍의 지도 TA 주디스 힐 보스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을 어떻게 학습 커리큘럼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였다. ‘무용 작품 속 수평·수직 동작을 수학 도형으로 표현해 보기’ 등 다양한 발상이 쏟아졌다. 학생의 눈높이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설계하는 본보기를 경험한 뒤, 어느 참가자는 “좋은 의미에서 조종당한(manipulated) 기분”이라고 총평했다.
“예술교육 창의력 기르기로 가야”
매해 여름 열리는 LCI 워크숍에는 30여 개 프로그램에 세계 각지에서 수천 명이 지원한다. 올 ‘예술교육 입문’ 워크숍에는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네 명의 예술 종사자가 참가했다. 조각가 백미현(김천대 유아교육과 교수), 애니메이터 조득수(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 무용가 이현(공연단체 ‘노리단’), 예술행정 강정현(서울시 문화예술과) 등이다. 각자 다양한 단체에서 TA 경험이 있는 이들은 “기능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LIC 방식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들이 주목한 것은 예술을 통한 교육적 효과에 중점을 두는 태도. 조득수 교수는 “장르를 넘나드는 통섭 교육이 예술을 통해 실현되는 방법을 배웠다”며 “토론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이런 커리큘럼을 과학·역사 등 다른 분야에 응용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스콧 브랜슨 LCI 소장은 “예술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상력을 키우는 학습(imaginative learning)”이라며 “창의적인 사고를 북돋워줌으로써, 보다 평등한 출발을 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