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안성기씨와 아들 다빈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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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영화배우 안성기(44)와 큰아들 다빈(9.서울 구룡초등학교3)군이 평소 서로 하고 싶었던 말을 편지로 썼다.연예계에서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것으로 소문난 安씨 부자의 편지는 가정의 달을 맞은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安씨는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한국위원회의 친선대사를맡고 있기도 하다.
[편집자註] 저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영화에 나오거나 TV에서 상을 타는 걸 볼 때는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서 『저것 봐요,우리 아빠예요』라고 뽐내고 싶어요.전에 아빠와 같이 영화 촬영장에 다녀온 얘기를 했을 때는같은 반 친구들이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불편한 것도 많아요.어린이 대공원에 함께 놀러가면 사람들이 자꾸 사인받으러 오는 바람에 우리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데도 못가고 한참동안 기다려야 해요.
아빠는 컴퓨터 게임을 같이 해주고,자전거도 태워줄 때는 참 좋은데 야단칠 때는 무섭고 싫어요.식탁에서 골고루 먹으라고 나무랄 때는 진짜 싫어요.생각해 보세요.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으라니까 맛이 있겠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회초리로 때리지 않아서 좋아요.옛날에는 막 때렸는데 요즘은 말로만 야단치니까 훨씬 덜 무서워요.엄마는 늘아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해요.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나는 공부를 중간밖 에 못해 훌륭한 사람이 못될까봐 걱정이에요.커서 과학자.화가.영화배우.운동선수 가운데 하나가 되고싶은데….
또 나는 싸움하는게 싫어 다른 애들이 자꾸 괴롭히고 때려도 슬그머니 피해버려요.
그런데도 아빠는 『다음부터는 열심히 해라』『괜찮다.네 잘못이아니다』라고 말해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아빠는 문제집을 풀고 있거나,미리 숙제를 다해놓거나,밥을 잘먹거나,필립(네살짜리 동생)을 잘 데리고 놀면 껄껄 웃으면서 좋아하시죠.아빠가 좋아하는 이런 일을 자꾸 해야지 생각할 때가많은데 잘 안돼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어버이날이에요.작년처럼 학교에서 카네이션 예쁘게 만들어 가슴에 달아드릴게요.그런데 어버이날 조금 전에는 어린이날이 있잖아요.그때는 무선자동차 사주세요.그러면 카네이션 더 멋있게 만들어 드릴게요.부탁해요.
참으로 미안하고,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구나.
영화 촬영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울 때가 많아 함께 하는 시간도 많지 않은데다,아빠의 유명세 때문에 너까지 덩달아 남의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별 탈없이 구김살없게 잘 자라줘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밤늦게 귀가해 침대 한모퉁이에 동그마니 누워 잠에 곯아 떨어진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야릇한 측은함.대견함에 사로잡히게 된다.이게 아마 아버지들의 숙명이 아닌가 싶다.
보통 정성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게 「좋은 아버지」인 것같다.좋은 아버지란 일방통행식의 명령자나 단순한 놀이 동무가 아니라 진지한 대화의 상대,마음놓고 따라하는 가운데 배움을 얻을 수있는 교사여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 구나.
그래서 많은 아버지들이 치열한 생존경쟁 때문에 심적.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아버지 역할을 기꺼이 어머니에게 내주고 「나약한 아빠」「하숙생 아빠」로 전락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부지런해지고,더 신경을 써서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요구를 해오는 게 자꾸 게을러지려는아빠를 도와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나는 네가 커서 직업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상관없다고생각한다.학교 공부도 못하면 못하는대로 그만이지 어쩌겠니.다만다음의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은 꼭 되라고 당부하고 싶다.
먼저 착하고 성실해야 한다.남들이 약삭빠르지 못하고 바보같다고 흉봐도 좋다.이것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다음으로 자기가 택한 분야에서는 반드시 철저한 「프로」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직업적 보람을 찾기 어렵다.
아빠가 아직 어린 너에게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했다.쉽게 말하자면 너를 무척 사랑한다는 얘기다.계속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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