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스타스토리>아기공룡 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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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억4천만년전쯤 공룡이 지구의 주인이던 시대.세상이 좁다고 뛰놀던 새끼 공룡 한마리가 빙하기를 맞아 얼음속에 묻힌채 잠이든 뒤 20세기 서울에서 깨어났다.외뿔코 초록룡.앙증맞고 귀여운 아기공룡 둘리의 등장이다.
둘리는 인물 캐릭터 일변의 우리만화에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는동물 캐릭터.웬만한 인물 캐릭터를 능가하는 인기와 가장 많은 모델료를 받는 활약으로 한국만화의 슈퍼스타로 불린다.
둘리의 출연작을 추적하는 일은 한국만화산업의 현주소를 찾는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잡지.문고.출판.팬시.영화.TV만화영화.
게임팩.광고모델등 만화주인공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낸 유일한 우리 만화스타가 이 꼬마 공룡이기 때문이다.
둘리는 83년 소년 잡지에 첫 등장했다.이듬해인 84년엔 아이스바 광고모델과 팬시류 캐릭터로 발탁됐다.캐릭터 출연료는 1년에 1백20만원,외국스타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지만 당시로선 「우리 스타의 캐릭터산업 본격 진출」 이란 쾌거로기록된 일이었다.
87,88년 TV 만화영화 출연과 90년 숨은그림찾기용 책 『둘리를 찾아라』 출연으로 성가를 한껏 올린 그는 오는 7월 『아기공룡 둘리』로 극장영화에도 데뷔한다.게다가 CD게임과 음반취입도 할 예정이다.
둘리가 본업인 만화외에 캐릭터 출연등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약 15억원.걸음마 단계의 우리만화시장에선 천문학적인 액수다.
둘리는 인기 만화스타의 부가가치가 어디까지 극대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셈이다.
둘리의 인기비결은 우선 그의 독특한 캐릭터에 기인한다.둘리의캐릭터는 『톰과 제리』의 귀여운 생쥐 「제리」와 여러모로 닮았다.이들은 우선 쥐라는 징그러운 동물과 공포와 외경의 대상인 공룡이란 의외의 캐릭터를 모델로 삼았다는 공통점 을 지닌다.자칫 혐오감을 주기 쉬운 동물을 선택해 역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사랑스럽게 바꿔놓는데 성공한 것이다.독자의 허를 찌르는 발상이먹혀들어간 케이스다.
둘리는 만화의 영원한 주제중 유력한 한가지를 외곬로 그려낸다.바로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의 세계다.거기엔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낱낱이 담겨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안된다」「하지 말라」고만 해요.자기 잣대를 강요하는 거죠.제가 살던 공룡시대는 각자가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없었어요.』 둘리가 모습을 보인 80년대 초반은 전사회의 에너지가 굴곡되던 시점이었다.군사문화로 일컬어지는 권위주의가 팽배했고 완강한 기성질서는 신세대들의 개혁요구에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극중 「길동이아저씨」는 그런 기성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인물이다.둘리와는 천적일 수밖에 없다.둘리는 번번이 길동이아저씨를 골탕먹인다.다른 가족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길동이아저씨의 독선적 권위가 난데없이 나타난 아기공룡에 의해 수시로 무너진다.독자들은 그런 둘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둘리가 어린이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여기 있다. 『제 역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엉뚱한 해결사」예요.어려운 친구돕기,불의 앞에 참지 않기,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하기 등이 특기인데 꼭 엉뚱한 말썽으로 끝나죠.』 정 많고 의리있고 용기 넘치는 약간 어리숙한 친구.둘리가 가진 친근감의 실체다.간혹 그의 어린 팬들이 『둘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진짜 존재해요』라고 믿는 것도 「얌전.똑똑.복종」만을 강요하는 시대에 천방지축 둘리 같은 친구 하나 쯤 갖고 싶은 소망의 표현일것이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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