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봄날은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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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째서 청와대 측근의 축재비리가 이번 총선에선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북한에서 불어제친 북풍이 워낙 센 탓이었을까,아니면 액수 큰 비리에만 익숙해져 몇억원정도 축재엔 국민 모두가둔감해진 탓이었을까.나는 장학로(張學魯)씨 비리 를 한 측근의부정축재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니라 우리 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행태의 정치 스타일,「의협 정치」의 폐단이라는 포괄적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처음 張씨 축재비리가 터지자 청와대쪽에서 『고생만 하다가 먹고 살만큼 되었는데…』하는 장탄식이 나왔다.20대 젊은 나이에한 야당지도자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오로지 한분만을 모시며 살아왔다.때로는 가택연금이고,때로는 단식으로 군 사독재의 탄압대상 1호였던 지도자를 모시자면 그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것이다.정식 결혼도 못했고 축재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자그마치 20여년을 그렇게 살다가 꿈인지 생시인지 지도자가 집권을했다.「야! 학로야!」에서 「張실 장님」으로 호칭도 바뀌고 알아주는 사람도 생겨 으스대고도 싶었을 것이다.이러니 떡값도 받고 청탁도 해 거금을 모았지만 집안단속 잘못으로 들통났으니 그의 죄는 밉지만 인간적 연민은 남는다는게 측근들의 비슷한 공감대일 것이다.
어디 張씨 뿐이겠는가.오로지 의리와 의협심만으로 지도자 한분을 따른 사람이 좁게는 수십명,넓게는 수천명에 이를 것이다.이런 의협집단을 중국역사에서는 유협(遊俠).임협(任俠)이라 불렀다.이들 집단의 대표적 성공사례가 중국 최대의 국 가를 세운 한(漢)고조 유방(劉邦)이다.나쁘게 보면 거리의 건달이었고,좋게 보면 의협심과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다.이들 실업자들을 모아 유방이 집권을 했다.실세들끼리 만나 파티도 하고 지난 역경을 토로하며 술에 취하면 상하 가릴 것 없이 왕년의 건달로 돌아갔다.유방의 어깨를 잡고 『형님』하며 외치질 않나,툭하면 싸움이고 기둥에 칼을 날려 꽂기도 예사였다.보다 못한 유생 숙손통(淑孫通)이 황제에게 간곡히 진언한다.사적인 관계를 공적 관계로 바꿔야 하고 이를 위 해선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를 경청한 유방은 차례로 한신(韓信)과 소하(簫何)같은 가신들을 제거해 나간다.
군사정권 30년 세월에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임협집단을양산했다.운동권 대학생.재야인사.통일세력에 각종 단체,그리고 사경(死境)을 넘나들며 험난한 역경을 헤쳐온 또 다른 야당 지도자와 그분을 모시는 막강한 사단급 임협집단이 다음 집권을 위해 포진하고 있다.앞으로 우리 정치는 한맺힌 임협집단간의 피나는 정권투쟁밖에 볼 것이 없다는 암담한 심정이 든다.
우리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바는 한 가신의 부정축재에 국한되지 않는다.2천년전 유방집단에서 본 임협집단간의 투쟁과 갈등이21세기 정보화사회에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정치현실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이미 여야 가릴 것 없이 권력핵심에는 가신들이 자리잡고 있고,이번 총선에서 보았듯 전국 각지에서 임협집단간.운동권간.재야인사간 대결이 벌어졌다.차이가 있다면 어느 지도자를 모셨느냐,집권 임협이냐 미집권 임협이냐 일 뿐이다.
유방집단의 임협은 수백년 통치로 가능한 개국공신이지만 지역중심의 우리 현대판 임협은 5년단위로 끝나는 단명의 가신세력이다.따라서 국민은 5년단위로 구 임협과 새 임협간의 투쟁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새 임협집단이 집권하면 그중 누가 지도자와 가장 가까우며 그에게 어떻게 접근해 얼마의 돈을 은밀히 건네줘야5년을 무사히 넘길까를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평소 3金씨의 경륜과 지도력에 대해 외경에 가까운 존경을 보내는 사람이다.그러나 이 3金씨가 정계에서 물러나야 할 가장 큰 이유는 한풀이 임협집단 정치를 이번 한번으로 끝내자는데 있다.현 정부는 30년 군사독재를 마감하는 민 주화 이행기의 문민정부다.독재와 투쟁했던 의협집단의 역할은 이젠 끝났다.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수많은 의협집단의 정권참여는 이번 한 회로끝을 내고 정상적인 민주적 정권교체로 가자면 왕년의 임협들은 이젠 제각기 생업으로 돌아가 제 할일 을 해야 한다.
이 정권이 물러나면 투쟁의 전리품으로 우리 차례라고 믿는 구시대 임협집단이 상존하는 한 우리의 민주정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지만 우리의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만 있지 않은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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