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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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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일기 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생각과 뜻을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부터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래서 찾게 된 방법 중의 하나가 일기 쓰기였다. 말하기에 앞서 스스로 먼저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각오에서 몇 번이나 시작을 되풀이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가끔씩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기를 쓴답시고 애를 써본 덕분에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잠시라도 하루를 되돌아보니 왜 그렇게 미안한 일들이 많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지 하나하나를 헤아리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쩌자고 여태껏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생각에 그토록 무뎌질 수 있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 일기 써보니 고마운 일 많아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일임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려면 남의 마음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배워서 익힌다는 것은 듣고 읽어 알게 된 것을 꾸준히 연습해서 어느덧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일기 쓰기의 습관을 포기한 대신 요즈음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연습하고 있다. 어려울 것 같지 않은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돼 습관 들이기가 참으로 중요한 만큼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한 줄 모르고 지금까지 살다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니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자꾸 미루다가 지금이다 싶어 사방으로 찾아보았지만 고마운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당할 때라고 하니 그 말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고맙다니까 더 고마운 일이 생긴다. 미안하다고 하니까 상대방이 더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다는 말에 고맙다고 하고, 고맙다는 인사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힘들게라도 자꾸 입을 열다 보니 마음도 함께 열리는 것 같다. 이전에는 어색해서 하지 못했던 말들도 어렵지 않게 잘 나온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위로할 일도 많고 축하할 일도 많다. 위로하고 위로 받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축하하고 축하받으면서 서로가 가까워진다.

날마다 일기는 쓰지 못하더라도 1년에 한번 유서를 쓸 생각이다. 그래서 혹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제때 다 전하지 못했는지를 살펴야겠다. 그리고 특별히 더 고마운 사람이나 미안한 일이 있으면 한번 더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참이다. 살아생전에 미처 마음을 다 전하지 못했지만 늘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이라도 남길 생각이다. 엉뚱한 말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쓴 유서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하장을 대신해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 해가 지나 묵은 유서를 꺼내 읽을 즈음이면 시간이 지나서 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지혜도 덤으로 얻을 것이다.

*** 일년에 한번씩 유서 쓸 생각

그러고 보니 여유를 가지고 편지를 써본 지도 꽤나 오랜 듯싶다. 전자우편과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상 속에 살고 있지만 편리함과 성급함에 중독되어 생각을 담고 마음을 실어 본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입을 모아 '감성'을 외치고 있지만 감성은 어디에도 없고 '감각'만 남아 있다. 느끼는 대로 반응하는 것이 솔직하다면서 걸러지지 않은 말들을 마구 쏟아놓고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얼마나 상처가 될지를 마음으로 헤아리는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급해도 지금보다는 좀더 느긋했으면 싶다. 느끼는 만큼 생각도 해보고 말을 앞세우기 전에 글로 다듬는 일에도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그러다 보면 미안한 일도 많고 고마운 일도 많아질 것이다. 이래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홍승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