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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식 개혁이냐, 레이건식 방임이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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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11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1년 7월 어느 날 백악관 오벌 오피스(집무실)에서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자신의 경제정책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이전 대통령과 다른 소품을 들고 나왔다. 경제학 교재에나 나오는 그래프 차트였다. 연기자 출신답게 그는 능숙하게 손가락으로 그래프(래퍼 곡선)를 가리키며 “세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세수가 줄어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경제학과 교수 같은 풍모였다.

당시 전문가들은 ‘훌륭한 연기’라고 촌평했다. 그들은 레이건의 배후에 어떤 연출자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서 래퍼 등 공급 중시 경제학자들이었다. 레이거노믹스(레이건의 경제정책)의 실제 설계자들이다. 그들이 제시한 기업 감세, 재정 지출·통화량 증가 억제 등의 정책은 레이건 집권 8년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다.

27년이 흐른 요즘 일단의 경제 전문가들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나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 진영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이론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정책을 벼리고 있다.

대통령 선거철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올해 유달리 관심을 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색 인종 후보가 등장한 데다 주택시장 붕괴, 경기 침체, 유가 급등,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등 레이건 시대 이후 최대 경제위기에 직면한 탓이다. 격동의 시대, 그들 머릿속을 가늠해 보면 내년 이후 미 경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오바마: 젊은피
오바마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변화’다. 그래서인지 그의 경제 브레인들은 젊어 ‘영건(Young Guns)’으로 불린다. 영건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젊은피다. 오바마의 경제 교사 트리오로 꼽히는 시카고대 오스턴 굴스비(37) 교수와 하버드대 제프리 리브먼(39), 데이브 커틀러(41) 교수는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이다. 젊다고 실력이 떨어지진 않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을 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세 사람에 대해 “모두 정상급 경제학자”라고 평가한다.

오바마 경제정책의 큰 틀 짜기는 굴스비의 몫이다. 그는 미 경제학자 지형에서 중도파로 분류된다. 뉴욕 타임스(NYT)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는 그는 시카고대에서 경제원론뿐 아니라 경제정책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쓴 논문은 주로 정보기술(IT)과 미디어·조세정책 등에 관한 것들이다.

굴스비는 최근 NYT에 쓴 칼럼에서 “부시의 감세로 덕 본 계층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감세를 해주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계층”이라고 주장했다.

리브먼은 연금과 빈곤 문제에 정통한 것으로 꼽힌다. 클린턴 정부 시절 사회복지 정책을 수립하는 데 깊숙이 간여했다. 또 커틀러는 의료·보건에 밝다는 평가를 듣는다. ‘왜 미국인은 비만해지고 있는가’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논문에서 각종 첨가물이 대량으로 들어간 포장식품을 비만의 주원인으로 꼽았다.

맨큐 교수는 “오바마 경제 교사 트리오의 머리에서 나온 경제정책 아이디어는 마이클 프로먼(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의 수석 보좌관)과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등의 감수를 받아 더욱 정교해진다”고 설명했다.

매케인: 관록
오바마의 경제 브레인들이 젊은 학자 일색인 반면 매케인 진영에는 스타 경영자와 노련한 경제 전문가도 참여하고 있다. 칼리 피오리나(54) 전 휼렛패커드 최고경영자를 비롯해 더글러스 홀츠-애킨(64) 부시 대통령 전 경제자문위원장, 마틴 펠트슈타인(69) 전 레이건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현 하버드대 교수) 등이다.

애초 필 그램 전 상원의원이 경제정책팀의 좌장이었다. 현재 매케인 진영의 경제 공약을 거의 완성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계 금융회사인 UBS의 돈을 받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관련 로비를 한 게 드러나 매케인 진영을 떠나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램을 뒤이어 경제팀의 간판 스타로 부상한 인물은 피오리나다. 그는 스타 경영자로서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법인세 감세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홀츠-애킨은 의료·보건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미국 의료보건 체계를 급격히 바꾸기보다 점진적으로 고치는 게 좋다는 쪽이다.

펠트슈타인은 미국 10대 거시경제학자로 꼽힌다. 공공 재정 분야를 중심으로 저서와 논문 300편을 발표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레이건이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군비 지출을 늘리자 이를 강력히 비판하며 위원장직을 그만둔 소신파이기도 하다. 부시 정부가 제안한 사회보장보험 등의 민영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비현실적 좌파” vs “케케묵은 교리”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자인 레지스 매키너는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는 뚜렷하게 다른 주장과 논리가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오바마와 매케인의 경제정책은 기본 철학부터 다르다. 그러다 보니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고 있다. 상대편을 향해 오바마 진영은 ‘케케묵은 공화당 교리의 재탕’이라고, 매케인 진영은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좌파 논리’라고 일갈했다.

오바마 진영은 서브프라임 사태와 금융위기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시작된 규제 완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와 시장 자유화가 방종을 낳았고, 그 결과 거품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기존 패러다임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3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공황 직후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흔적이 많이 엿보인다. 새로운 룰(법규·관행)을 마련해 시장과 경제가 다시 한번 도약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굴스비 등 오바마 경제 브레인들은 대공황 직후 루스벨트가 추진한 개혁을 복기해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의 신뢰성·건전성과 일반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매케인은 ‘존재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섣불리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다. 경제적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로운 경영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80년 레이건 대통령 이후 부시 현 대통령까지 이어진 감세와 자유무역 확대, 민영화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 메커니즘을 활용해 경제를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오리나 등 매케인 경제 브레인들은 의료보험 시스템과 경제 활성화 등 미국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기업을 앞세우고 있다. 1920년대 이후 미 공화당이 유지해 온 ‘기업이 잘 돼야 미국이 좋다’는 철학이 짙게 배어 있다.

감세·주택·FTA…
최근 두 진영 경제 브레인들은 경제정책 구상을 발표했다. 오바마 진영은 ‘중산층 성공을 위한 어젠다’를, 매케인 진영은 ‘미국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내세웠다. 양측 모두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좋은 어휘를 많이 동원했다. 찬찬히 뜯어보면 양쪽의 정책 방향이 서로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오바마는 중산층 이하 계층의 세금 감면을, 매케인은 기업의 법인세와 투자 관련 세금 감면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선 양쪽이 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바마 쪽은 부시 행정부가 한국 등과 맺은 FTA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매케인은 FTA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미래의 주적’인 중국과도 FTA를 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석유 가격 안정을 위해 오바마는 하이브리드 자동차 개발 등에 정부 예산을 지원해 기름 소비를 줄이겠다는 쪽이다. 이에 대해 매케인은 환경단체 반발 때문에 금지된 미국 연안의 원유 채굴을 허용해 공급을 늘려 값을 떨어뜨리겠다는 입장이다.

나날이 가격이 떨어져 미국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주택시장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지원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단 오바마가 매케인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해 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 경제분석업체 ‘이코노미닷컴’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는 “오바마나 매케인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금융위기 뒷수습을 하느라 첫 번째 임기 4년 동안 자신의 경제정책을 실시할 기회를 잡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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