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한국이 중국을 누른 ‘전설의 10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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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02면

장엄한 서사시였다. 화려함은 압도적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옛 중화 제국의 영광을 환상적으로 재현했다. 공자의 삼천 제자, 정화(鄭和) 함대의 대원정, 실크로드, 진시황 병마용. 대륙의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의 정수만 뽑아 강렬하게 표출했다. 세계는 넋을 잃고 기죽었다.

나는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를 떠올렸다. 1990년 초여름 때다. 승용차는 보기 힘들고 자전거로 가득했던 천안문(天安門) 광장, 웃통을 벗은 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문화대혁명(1966~76)의 파괴의 상처가 드러나는 문화재들은 당시 익숙했던 장면이다. 개방의 활기찬 구호 속에 후진의 초라한 잔재들이 교차했다.

그때 만난 50대 중국인 학자의 상실감과 부러움 섞인 이야기가 기억난다. “문화대혁명 탓에 우리는 수십 년 뒤떨어졌다. 남루한 폐쇄의 민족주의, 극좌파의 잔혹한 광기(狂氣)로 인해 역사 퇴보의 열병을 앓았다. 그동안 한국은 홀로 앞서가고 번영은 눈부셨다. 중국이 한국에 뒤처진 역전 현상은 수천 년 양국 관계에서 처음이다.”

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외환위기까지 근 10년-. 한·중 역사에서 특별한 예외의 시기였다. 그 시절 대다수 한국인은 베이징에서 으스댔다. 자금성(紫禁城)의 위용 앞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의 경복궁과 비교할 때 위축됐지만 그런 감정은 잠시였다. 중국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배우려 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현대사 약진을 그들이 더 인정했다. 우리 조상이 주눅 들며 종속국 사신의 고단한 처지에 놓였던 곳 아닌가. 그 시절 거기서 맛본 우월감은 어색했지만 짜릿했다.

그 역전의 시대는 전설이 되었고 신화를 남겼다. 한·중 역사에서 과거에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10년’이었다. 이제 그 시절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거대 중국을 의식하며 사는 시대로 환원했다. 대국은 우리 곁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의 성취와 야망은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기회이며 압박이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수출 시장이며 가장 큰 투자 대상국이다. 13억 명의 냐오차오(鳥巢)는 독보적 기회의 둥지다. 중국은 외교·군사 강국이다. 북핵 6자회담에서 그 위상은 뚜렷하다. 동북공정에 이어 이번엔 이어도 영유권 논쟁이다. 김정일 정권의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은 우리의 힘겨운 경쟁 대상이 된다.

한국은 그 역전의 시대를 재도약의 동력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 시대의 의미 파악도 등한시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리더십의 상상력 부족, 무능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때 외교 전략 미숙은 한국의 침체를 깊게 했다. 그들이 내놓은 동북아 균형자론은 어설픈 민족주의가 낳은 희극이다. 국제 질서에서 균형·조정은 강자가 선택·향유하는 전유물이다. 한국이 그걸 들고 나왔을 때 미·중·일·러 4강은 속으로 비웃었다.

후유증은 컸다. 한·미동맹은 약화됐고 미국은 일본과 결속했다. 반면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은 강력해졌다. 아직도 그런 학습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촛불집회에는 낡은 폐쇄의 민족주의가 판치고 있다. 촛불의 지휘 세력은 우리 현대사를 뒤틀고 업적에 상처를 내고 있다.

한·중 역전의 전설을 만든 주역들은 2선으로 물러났다. 그들에겐 책무가 남아 있다. 그 시대를 이끈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의 참모들은 치열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대다수 참모는 시대정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편승해 왔다. 젊은 세대에겐 역사의 감수성을 키워줘야 한다. ‘열린 민족주의’의 경쟁력 덕분에 한 시절 중국에 큰소리칠 수 있었고, 부국강병 없이 동북아에서 평화롭게 살기 힘들다는 점을 실감시켜야 한다. 그래야 한·중의 친선과 교류는 당당해지고 세련된다. 중국으로 향한 기회의 창은 확대된다. 공동 번영의 기틀은 단단해진다.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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