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엄마는 밥이야? … “안식년 주기 위해 가출시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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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났다’ 세상이다. 도처에 ‘뿔난’ 사람들이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경기침체, 그리고 독도 논란까지. 그중 으뜸은 KBS 주말극 ‘엄마가 뿔났다’다. 또 극중 예순 넘은 어머니 김한자(김혜자)의 ‘가출사건’을 계기로 요즘 기혼 여성 사이에선 ‘주부 독립만세’가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드라마도 최근 전체 시청률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뿔났다’의 진원지는 극작가 김수현(65)이다. 지난해 ‘내 남자의 여자’로 중년부부의 위기를 극대화했던 그가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가족관계를 다각도로 꿰뚫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작가가 데뷔 40년을 맞은 해다. 인터뷰 거부로 유명한 그를 겨우 전화로 붙잡았다. 작가는 “인터뷰가 아닌 잡담이니 결코 기사화하지 마라”는 당부를 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송곳 같은 드라마 대사만큼 그의 답변은 직설적이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뚫어보 는 그는 우리 시대의 무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당이란 표현이 거슬릴지 모르겠다. 복잡 다양한 캐릭터를 그려내려면 신기(神氣)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싫지 않은 표현이다. 옛날부터 나 자신을 무당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의미의 무당인가.

“무당이 누구인가. 신이 오르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을 쏟아낸다. 지난 40년, 드라마도 그렇게 쉬지 않고 써온 것 같다.”

-나이석(강부자)의 딸 최은실(김지유)도 신기가 있다. 혹시 작가의 분신인가.

“그건 아니다. 세상에는 직감과 예감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이런 캐릭터도 하나 있으면 재미있겠다 싶어 집어넣었다.”

-‘뿔났다’ 신드롬이 일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둔 제목인가.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조어가 아니다. ‘엄마가 화났다’보다 더 낫지 않은가. 처음 감독(정을영)에게 제목을 주었더니 ‘너무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며칠 후 ‘좋다’고 했다. ‘뿔났다’가 이렇게 회자될지는 몰랐다. 사람들이 ‘뿔났다’라는 단어를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웃음)

-한자의 가출이 단연 화제다. 이를 계기로 시청률도 뛰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달려든 설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별로 트집 잡을 게 없는 환경의 엄마를 집밖으로 나가보게 하자는 생각을 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말인가.

“경우가 다르다. 노라는 집을 나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노라의 남편은 너무 쫀쫀했고, 아내를 장식처럼 취급했다. 노라는 여성해방 차원에서 나간 것이다. 한자는 아니다. 남편이 폭력을 쓰나, 바람을 피우나, 아니면 도박을 하나. 가출 사유가 뚜렷할 때 나가는 건 촌스럽다. 굳이 말하자면 이건 엄마 해방이다. 또 주부 해방이다.”

-한자의 가출에 공감하나.

“나 같으면 절대 그러고는 못산다.” (하하 )

-이유가 있다면.

“주부의 하루는 말로 아는 것보다 훨씬 극심한 노동의 연속이다. 주부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실 이혼을 시키면 좋았었는데 그건 너무 심하다 싶어 안식년으로 갔다. 한자에게 휴가를 준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머니 역할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어머니는 이래야 된다’는 고정 틀을 씌운다. 왜 엄마가 ‘밥’이어야 하나.”

-그래도 너무했다는 반론이 세다.

“네티즌들의 갑론을박을 알고 있다. 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시어머니가 나갈 수 있느냐고 토를 다는 젊은이가 많다. 그건 어머니의 인생을 너무 몰라 하는 말이다. 한자는 40년 동안 주부로 일했다. 그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낄 수 없는 건가. ”

-그래도 남은 며느리가 고생을 짊어져야 하지 않나. 며느리의 희생을 담보로 한 가출이 아닐까. 시청자 중에는 자기 (시)어머니가 한자처럼 갑자기 ‘자각’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그건 며느리의 인생이다. 한자네 집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시어머니의 40년 인생과 비교할 수 없다. 담보는 무슨 담보인가. 어디서 공주 며느리 데리고 왔나. 모두 대등한 인간이다.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너무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엄마의 자의식 운운하는 건 노예해방을 두려워했던 농장주와 같은 마음보다.”

-부잣집 마나님 고은아(장미희)의 인기가 장난이 아니다.

“모두 장미희씨의 능력과 재능 덕분이다.”

-장미희와는 첫 작업이다.

“감독이 시놉시스(요약본)와 캐릭터를 보고 먼저 캐스팅을 제안했다. ‘그 아가씨가 나를 무서워할 텐데, 그래도 한다고 하면 해보자’고 했다. 정말 성실한 배우다. 내가 많이 놀랐다. 절대 쉬운 배역이 아닌데, 최선을 다하는 게 그냥 보인다.”

-특별한 주문은 없었나.

“그냥 써준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다.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당신 목소리 그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우아한 척 재수 없을 것 같은 고은아가 전혀 밉지 않다. 귀엽다는 느낌마저 든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 고은아는 사실 재미없는 캐릭터다. 다 미희씨가 잘해서 그런 거다. 나는 밥맛 없거나, 보기 싫은 인물은 그려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장미희에게는 그렇게 관대한 시청자들이 김혜자에게는 그렇게 엄격한지 모르겠다.”

-특별히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그런 건 없다. 다 똑같다. 모두가 잘한다.”

-드라마는 현대가족의 만화경이다. 세대별·계층별 등등 이런저런 종류의 사랑과 부부가 나온다.

“세대별로 각기 다른 가족상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했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관계는 관심이 없다. 내가 커왔던 세대와 요즘 세대는 무척 다르다. 당연히 사랑 방식도 다양하다.”

-요즘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드라마로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평소 가족에게 묶여 살았던 한 주부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 확 떨치고 일어나는 이야기다.”

-한자의 딸 가운데 둘째 영미(이유리)를 편애하는 인상이다.

“편애는 아니다. 그나마 둘째 딸이 가장 따듯하고 보드랍다. 무엇보다 따지질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다. 너무 순종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너무 괜찮은데 시어머니 은아에게 순종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그게 족쇄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남편과 시아버지도 결국 모셔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편안한 관계도 족쇄가 된다.”

-전작 ‘내 남자의 여자’와 무척 다르다.

“이번 드라마가 단체여행 같아 그럴지 모르겠다. 글을 쓰는 데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월~목요일 작업을 하고 주말에는 철저히 쉰다. 잡담은 이것으로 끝내자.”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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