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칼럼>20억원의 떡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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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라디오 뉴스에서 장(張)아무개 사건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운전기사들은 핏대를 세운다.권력 핵심부에 대해 육두문자가 거침없이 쏟아진다.이런 분노들은 지하철에서,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으레 들을 수 있다.
누구는 사정(司正) 개혁의 서슬퍼런 뒤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데 대해 분노한다고 한다.누구는 깨끗한 정치의 주역이어야할 대통령의 측근에 의해 그런 일이 저질러진데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또 어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일 따름이라고 아예 냉소해버리고 만다.
이 사건의 법적 처리 방향은 이미 제시됐다.그리고 그 정치적영향은 앞으로의 선거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탁도(濁度)를 드러낸 한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그는약6억원의 뇌물성 돈을 받은 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검찰이 현재까지 밝혀낸 그밖의 돈 20여억원은 「떡값」이며,그것은 범죄를 형성하지 않는 대상으로 면죄됐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장.차관들이 오며 가며 수고한다고 수백만원씩 놓고 갔다.그것은 수고비이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그에게 청와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기업들이 수백만원씩의 돈을 제공했다.그것은「때」가 되면 으레 내는 「떡값」일 따름이다.그 는 권력이 가장 강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떡값」의 크기가 컸을 뿐이라는 논리다. 우리의 법관행에 따르면 대체로 받은 돈이 5백만원을 넘어서면 뇌물로,그 이하는 「떡값」으로 분류된다고 한다.때로는1천만원까지도 「직위상 받을 수 있는」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준은 어떻게 해서 마련된 것인가.5백만원(또는 1 천만원) 이하를 모두 죄로 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기 때문일까,아니면 5백만원 이하 정도면 관행적으로 받아도 될 만한 액수라는 뜻일까.
우리는 어쩌면 그런 관행적 부패의 늪 속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너무 맑은 물속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은 「적절한」 수준의 부패를 합리화하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그 「적절한 수준의 부패」에 항상 눈감아오 다 더 큰 부패,5.6공과 같은 국가적 부패를 낳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패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고 신축적이다.
야당은 장학로(張學魯)사건을 선거의 호재라고 떠들어댄다.당연하다.그러나 그들이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공천헌금 20억원 요구설이나 전국구 순번과 관련된 30억원 제공설과 같은 추문은 그들 역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든다.아마도 정권을 추문이 벌어지고 있는 다른 정당이 잡았다고해서 장학로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있다면 그것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앞으로 「떡값형 부패」가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한 대형 부정도 여전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대선자금문제로 거의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도덕적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그렇더라도 적어도 앞으로정치적 지도자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치자금 운영 방식과 앞으로의 결의에 대한 명백한 선언을 해야 하며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번 사태를 놓고 외국에서는 「모든 정치인을 더러워지게 만드는」 한국의 부패한 정치구조를 조소하고 있다.이것은 천민형(賤民型)정치를 청산하지 못한 데 따른 당연한 수모다.그 청산의 책임은 얼마 남지 않은 투표에서 어떤 정치를 선택 할 것인지,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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