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스승 이름으로 장학재단 세운 당대의 명필 치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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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궁은 평소 인형을 좋아했다. 개구리 인형이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외출할 때는 토끼 인형을 팔에 안고 다녔다. 김명호 제공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일정 중에 ‘서예가 면담’이 있었다.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치궁(啓功)과의 만남이었다. 애초에는 붓글씨를 즐겨 쓰던 대통령인지라 류리창(琉璃窓)을 방문해 벼루를 한 점 구입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치궁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볼 때 벼루 구입과는 비교가 안 될 상징성 있는 행사였다.

치궁은 1930년대부터 명필이었다. 게다가 어법학자(語法學者)이며 성운학(聲韻學)의 대가였다. 그림은 송대(宋代) 문인화의 화풍을 계승했다는 소리를 어려서부터 들었다. 본명은 아이신쥐에루오 치궁(愛新覺羅 啓功), 만주족이며 청(淸) 왕조의 후예였다. 9대조가 청의 다섯 번째 황제인 옹정(雍正)의 아들이며 건륭제(乾隆帝)의 동생이었다. 고조부 때에 모친이 측실이라는 이유로 왕부에서 쫓겨났다. 증조부는 과거를 통해 입신을 모색했다. 거인(擧人), 진사(進士)를 거쳐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예부상서까지 지냈다. 조부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부친은 치궁이 태어난 지 1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조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요절할 것을 염려해 라마교 사원인 융허궁(雍和宮)의 동자승( )이 되게 했다. 두 살 때였다.

1911년 청조(淸朝)가 몰락하자 정계에 염증을 느낀 증조부는 허베이(河北)성 이(易)현으로 이주했다. 그 바람에 치궁도 2년 만에 환속했다. 조부가 작은 부채에 붓을 몇 번 끄적거리니 석죽화(石竹畵)가 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게 5살 때였다. 증조부와 조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만주족에게는 특이한 풍속이 있었다. 출가한 고모는 남이나 다름없었지만 출가하지 않은 고모는 집안에서 가장 권위가 있었다. 20을 갓 넘은 치궁의 고모는 조카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

치궁은 소학 시절 서화반(書畵班)에 가입했다. 학교에서는 저명인사들이 방문할 때마다 그의 습작들을 선물로 증정했다. 학생의 습작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받는 사람들은 명화를 선물 받았다고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치궁 덕분에 경비가 많이 절약됐다. 그래도 학비는 꼬박꼬박 받았다. 소학을 마치자 조부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대대로 내려오는 서향세가(書香世家)에 맥이 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치궁의 교육을 전담하겠다고 나섰다. 다이장푸(戴姜福)라는 한림 출신이었다.

그러나 계속 공부만 하면 모친과 결혼도 포기한 고모는 누가 책임지느냐며 한 달에 30위안(元)을 벌겠다고 생활 전선에 나서려 했다. 물론 고모의 반대로 무산됐다.
다이장푸는 치궁에게 고전(古典)과 전통 시사(詩詞)의 작법 등을 가르치며 고궁(故宮)에 진열된 서화를 감상케 했다. 당대의 대가들과 함께 작품들을 둘러보며 평(評)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치궁을 참석하게 했다. 일가를 이룬 학자이며 예술가들이었지만 구석에서 열심히 받아 적던 판다를 닮은 소년 덕분에 자신들의 이름이 후일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치궁이 평생의 스승인 천위안(陳垣)을 만난 것은 결혼 이듬해인 21세 때였다. 천위안은 푸런(輔仁)대학의 교장이며 대학자였다.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에 일가를 이룬 젊은 치궁의 재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천위안은 치궁을 푸런대학 부속중학 교사로 초빙했다. 그러나 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교사가 되려면 사범학교를 나와야 했다. 치궁은 사범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천위안이 보고하러 온 직원에게 “부속중학은 그렇다 치고 대학에도 그런 규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학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천위안은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치궁은 푸런대학 교수가 됐다. 푸런대학은 중공정권 수립 후 베이징사범대학과 합병했다.

치궁은 1990년 홍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40년간 스승으로 모셨던 천위안의 120회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3년간 준비한 작품들이었다. 이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운집했다.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전시회 수입금 163만1692위안을 챙겨 베이징에 돌아온 치궁은 리윈(勵耘)장학조학기금(奬學助學基金)을 창설했다. 천위안의 서재가 리윈서옥(勵耘書屋)이었다.

치궁은 말년을 융허궁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보냈다. 동자승 시절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독경하며 지난날을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200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사회 각계에서는 800만위안을 모금했다. 격변의 시대에 가장 천진난만한 삶을 살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를 위해 치궁교육기금회(啓功敎育基金會)를 설립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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