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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간과의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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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故) 민두기 교수는 근현대 동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으로 '시간과의 경쟁'을 꼽았다. 특히 20세기 들어 중국과 일본은 시대적 과제를 추구하는 데 몹시 조급했다고 지적했다.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했다는 얘기다.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은 다른 나라에서 단계적으로 이뤄졌던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삼민주의(三民主義)로 단숨에 이룩해 구미를 앞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毛는 남의 나라에서 1만년 단위로 역사가 전개될지라도 중국에서는 한시간, 한나절 단위로 급박하게 역사가 전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조급성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참극으로 이어졌다고 閔교수는 지적했다. 그나마 덩샤오핑(鄧小平)이 비교적 '느긋하게' 장기적 목표를 설정한 데 힘입어 중국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하루빨리 끼어들어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에 절제없는 팽창을 거듭했다. 이러한 조급증이 중국 침략.태평양 전쟁 등으로 이어졌고, 일본뿐 아니라 세계의 재난을 불러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경제적 팽창에 매진하고 있지만 과거의 절제없는 팽창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일본이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여전하다고 閔교수는 걱정했다.

조급증은 사회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는 추동력(推動力)이 될 수 있다. 다만 정확하게 인도되고 조절돼야지, 그렇지 못하고 무한하게 팽창하거나 남용되면 민족의 재난이 될 수 있다고 閔교수는 '시간과의 경쟁-동아시아의 혁명과 팽창'에서 강조했다.

조급증에 관한 한 한국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조급증에 힘입어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그 후유증으로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다. 요즘엔 대통령 탄핵이라는 흔치 않은 사건까지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여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힘입어 노무현 정부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급하게 서두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 시간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閔교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