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⑪ 24년간 가계부 쓴 대문호 루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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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상하이 징윈리(景雲里) 자택 서재에서의 루쉰. 사진=김명호 제공

루쉰(魯迅ㆍ1881~1936)의 경제상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제대로 된 수입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는 얘기다. 190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루쉰은 항저우ㆍ사오싱ㆍ난징에서 3년, 베이징에서 14년, 샤먼ㆍ광저우에서 1년, 상하이에서 9년 등 27년간 사회활동을 했다. 처음 3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단오절에서 중양절까지 겉옷을 한번도 갈아입지 못했다. 사탕 물고 담배 피우며 밤 늦게까지 책 보는 게 습관이었지만 사탕도 남이 사다 주는 것만 먹었다. 교사 월급 30은원(銀元)이 박봉은 아니었으나 도서 구입비가 지나치게 많았다. 1은원은 당시 한 가구 한 달 부식비로 현재의 약 50위안에 해당한다.

루쉰은 12년 5월 5일 베이징 교육부 시절부터 36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 24년간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수입에 관한 기록이 수천 군데일 정도로 상세하고, 매년 구입한 책과 가격을 연말에 따로 정리했다. 가계부를 겸한 책 구입장부 격이었다.

고정 봉급 외에 원고료와 강연료가 루쉰의 주 수입원이었다. 베이징 시절 교육부에서 월 300은원을 받았다. 8개 대학에 출강한 적도 있었지만 강의료는 많지 않았다. 22년부터는 인세도 들어왔다. 참고로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던 마오쩌둥(毛澤東)은 매달 8은원을 받았다.

상하이 시절은 고정 수입이 없었지만 경제적으론 아주 풍족했다. 인세와 편집비가 인민폐로 환산해 54만 위안에 달한 해도 있었고, 매달 평균 2만 위안 정도를 웃돌았다. 24년간 총수입이 12만 은원을 넘었던 루쉰이 가장 중시한 것은 책이었다. 베이징 시절 2000은원짜리 집을 사면서 도서 구입으로는 4000은원을 썼다. 총서와 전집류를 포함해 1만7000여 종의 책과 탁본, 고대 판화 등을 모두 자력으로 구입했다. 루쉰이 교육부를 사직하고 외로운 전사(戰士)로 나설 때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계속해 300은원을 지급하려 했지만 거절했다. 손을 벌리거나 후원금을 요구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인격 형성에 장애요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루쉰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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