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네가 그 위에 앉아 있을 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선영(1964~ ) '네가 그 위에 앉아 있을 때' 전문

딸 아이가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변기 위에 맨살을 드러낸 채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을 때
바지가 무릎께 걸려 있는 짧은
두 다리가
아직 바닥에도 닿지 못하고 대롱거리고 있을 때
잠자다가 눈도 못 뜬 채 속옷 바람으로 어정어정 걸어나와
고개를 수그리고 변기 위에 억지로 들려 있을 때

내가 너에게 한 짓이 무엇이냐
한평생 거기에서 놓여날 길 없는
변기 위에 너를 잡아 앉힌 것?



한평생 변기 위에 앉아 있는 생은 없다. 한평생 단 한번 변기에 앉지 않은 생 또한 없다. 중요한 것은 생이 변기 위에 앉은 기억을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변기 위에서 꿈을 꿀 수도, 변기 밖에서 곤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딸이여,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쑥쑥 자라라. 그리하여 모든 어미들의 불안이 깊은 사랑과 연민에서 비롯된 기우임을, 생이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빛나는 무지개로 보여다오.

곽재구<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