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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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로빈 그린-.
외국인이지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남자다.아니,외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한지도 모르겠다.왜 그럴까.
사랑이나 결혼 상대로서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바라보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남자들마다 아리영을 진한 관심으로 대했다.그들은 아리영 앞에나란히 선 「후보자」였다.「한국 남자」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그들은 모두 아리영을 두고 겨루는 후보자일 수 있었다.
외국살이를 오래 했지만 외국인을 사랑과 결혼의 대상으로 꼽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소녀 때부터 미스터 조만을 줄곧 생각해왔던 탓일까.왠지 외국인은 항상 아리영의 리스트권 외에 있었다. 그 외국인 가운데 하나가 아리영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가다보면 별안간 시계(視界)가 트이며 발 아래 들판이나타날 때가 있듯이 미스터 로빈 그린은 사랑의 대상 한계를 단번에 넓혀 보여 주었다.
그는 한국의 고미술품 중에서도 특히 가야(伽倻)토기에 관심이있다고 했다.외할아버지가 토기를 좋아하여 모아놓은 것 중의 태반이 가야 토기라고 하자 그는 눈을 반짝이며 보여줄 수 있느냐고 했다.잿빛을 머금은 푸른 눈이 우물 안 하늘 같았다.
『언제건 한국에 오시면 보여드리죠.』 깊은 그 눈빛에 끌려 응낙해 버렸다.흡사 사랑의 고백을 받아들이고만 느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가야 토기」에 빗댄 사랑의 프로포즈였을까.그는 반드시 서울에 나타날 것이다.그리고 또 반드시 아리영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것이다.그때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는지.미리부터 부담스러웠다.그러나 역겨운 것은 아니었다.묘한 감정이다.
『위대한 천재예요.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이자벨이 흥분한목소리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며 다가왔다.아리영을 보자 그녀는느닷없이 껴안았다.
『천재를 만나게 해준 아니안느에게 감사해요.』 그림에 대한 그녀의 순수한 열정이 사랑스러웠다.
늦은 점심을 아버지가 샀다.시동생 맞선 때문에 정길례여사와 만난 호텔 레스토랑이다.박물관에서 가장 가까운 고급 레스토랑이어서 오게 된 것이긴 해도 아버지 마음엔 늘 이 호텔이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었다.오늘 밤에라도 정여사에게 전화 하리라 싶었다. 『참 이상한 일이 있네요!』 음식이 나오기 전 단원에 관한 영문 책을 뒤지던 이자벨이 말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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