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아 or 독설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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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07면

일러스트 이정권

독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MC 김구라가 최근에는 잇따른 ‘사과’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KBS-2TV ‘상상플러스’에서 이효리에게 그동안 별러 왔던 사과를 했고, SBS ‘절친노트’에서는 문희준과 그의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MBC ‘라디오스타’를 통해서도 김선아·신애 등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 시절의 발언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그의 독설에 쾌감을 느껴 왔던 팬이라면, 더구나 농도 짙은 욕설로 버무려진 인터넷 방송 시절의 그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김구라가 지금 왜 지난날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인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구라의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박명수나 지상렬 혹은 왕비호까지, 이른바 비호감 혹은 막말 개그·호통 개그를 다 깔깔거리면서 즐기는데 김구라는 보면서 키득대기는 하지만 별로 유쾌하다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김구라 쪽이 상대편에 대해 훨씬 더 인신공격적이면서도 자신에 대한 방어막은 단단히 치고 있는 스타일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경규가 호통을 칠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비난의 화살이 자신보다 강한 방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위에 서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내리누른다. 여성의 신체나 이름, 아픈 과거 같은 것이 그래서 주 공격 대상이다. 다른 이들의 막말에는 “넌 나보다 잘났지만 나도 이만큼 저항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면, 김구라의 말에는 “너를 꼼짝도 못 하게 짓밟아 주겠어” 같은 민망함이 담겨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코드’와 상관없이 그가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상대방을 요리해 나가는 걸 보는 재미는 만만찮다. 김구라는 지난해 한국 방송 오락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를 가져올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인 올바름과 착한 척의 위선을 깨는 쾌감을 안겨 주는 그의 막말은 확실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지난날의 사과라니. 아무리 거북한 쌍욕으로 가득 찼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던, 혹은 있을 거라 믿었던 진실을 까발려 내는 일말의 진정성과 그의 용기에 열광했던 팬들이라면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법하다. 그의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거 때는 잔뜩 공약을 내놓고 당선되니 딴소리하는 국회의원이랑 뭐가 다르냐”고.

판을 뒤집고 남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사려면 모든 걸 걸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비호감의 다리를 건너면서. 악으로 버텨 주는 자신의 매니어 팬에게 근근이 기대면서. 그래야 자신의 코미디가 새 권위를 얻으면서 새 판을 짤 수 있는 것 아닐까.

무엇을 사과한다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효리가 인정했던 것처럼 “한때 먹고 살기 위해서” 그랬던 것에 대해서? 현재 그의 개그 중 중요한 메시지는 ‘돈에 대한 떳떳한 애정표현’이다. 과연 그의 생각은 바뀐 것일까. 그럼 지금 다시 더 잘 먹고살기 위해 이런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문희준과의 재회를 담은 ‘절친노트’는 그저 방송 1회분을 위한 ‘사과-용서 이벤트’로밖에 안 보였다. 별로 진심이 담겨 보이지도 않고, 보는 사람도 후련하게 해주지 못하는 이런 사과 퍼레이드는 김구라의 팬층만 깎아 먹는 게 아닌가 싶다. 독한 개그맨으로 이름나고 싶으면 더 철저히 독해졌으면 좋겠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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