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세종이 공자에 맞서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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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러시아 볼가강 유역에 있는 카잔 국립대학교는 설립된 지 204년이나 되는 명문대다. 황제 칙령으로 세워진 대학으로는 러시아에서 둘째로 오래됐다. 톨스토이는 이 대학을 다닐 때 카드놀이와 춤·여자에 흠뻑 빠져 살다 3학년을 못 마치고 중퇴했다. 법학부에 다니던 레닌은 학생운동을 하다 체포돼 유형을 가는 바람에 역시 졸업하지 못했다. 막심 고리키는 어릴 적부터 카잔대 입학을 꿈꾸었으나 도저히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들을 배출했고, 특히 동양문화·역사연구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대학이다.

곽부모(36) 교수는 재작년 9월부터 카잔대 동양학대학에서 한국어·한국학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선한 해외파견 객원교수 자격으로서다.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점차 학교 측의 인정을 받아 지난해 9월 한국어문학 전공을 개설, 최초로 신입생 15명을 뽑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곽 교수는 ‘중국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4월 카잔대를 직접 방문해 “중국어를 동양권 언어에서 최우선으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무턱대고 중국어 우선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야심 차게 밀어붙이고 있는 중국어 해외 보급사업의 첨병이 바로 ‘공자(孔子)학원’이다. 알리앙스 프랑세즈(프랑스)나 괴테 인스티튜트(독일)를 본뜬 어학원이다. 중국은 최근 2년 사이 전 세계에 188곳의 공자학원을 세웠다. 러시아의 5개 공자학원 중 하나가 바로 카잔대에 있다. 후진타오는 카잔대 공자학원에 10만 달러를 내놓고 앞으로도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어 교수 2명과 상근 직원도 제공했다. 별도로 컴퓨터 20대와 100인치 벽걸이 텔레비전, 빔 프로젝트 장비를 갖춘 대형 강의실을 마련해 중국어문학 전공 학생만 이용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중국어 우선권을 요구한 것이다.

하마터면 중국어에 밀려 카잔대에서 한국어의 씨가 마를 뻔했다. 국제관계학부에 부전공으로 개설됐던 한국어 강좌는 결국 중국어로 대체되고 말았다. 중국 측은 한국어연구센터 공간을 중국어 전공자를 위한 도서실로 바꿔달라는 압력도 가해왔지만, 다행히 대학 측에서 “중국어만이 동양 언어는 아니다”며 거절해 미아 신세를 면했다.

나는 카잔대 사례에서 우리가 독도 문제에 열 받는 것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이라도 열을 받아야 나라가 제대로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어·한국문화를 해외 구석구석에 전파하는 일이 독도에 해병대를 보내자는 식의 즉흥을 일삼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본다. 전 세계의 일본어 학습 인구는 133개국 298만 명(2006년 현재)이다. 1979년 수치의 23배다. 한국어는 어떨까. 다행히도 요즘 들어 각국의 한국어 수요는 부쩍 느는 추세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시행하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가 97년 1회 시험 때는 2692명이었으나 지난해에는 무려 8만2881명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국내의 관련 기관이 난립해 도대체 체계나 두서가 없이 일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문화부·외교부·교육부·노동부와 산하 기관이 저마다 자기네 일이니까 예산을 더 달라고 나선다. 공무원들의 부처 이기주의 고질병이 여기서도 또 도진 모양새다.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어제부터 강원도 속초에서는 매우 뜻 깊은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인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이 주관하는 대회로, ‘다문화 시대의 재외동포 교육’이 올해의 주제다. 가봉·우간다·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6개국을 포함해 44개국에서 한국어·한국문화를 가르치는 300여 명이 자비로 비행기표를 구입해 모여들었다. 민간 부문의 이런 정성과 열기에 당국은 반성부터 해야 한다. ‘세종학당’이라고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붙여놓고 그동안 해놓은 게 무언가. 세종대왕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