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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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손수 끓이신 거예요?』 아리영은 놀랐다.치즈 빵조각을 얹은본격적인 양파 수프였다.
『쿠킹이 제 취미지요.사실 조리처럼 즐거운 창조행위도 없어요.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여성들이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짐짓 하는 소리같지는 않았다.
『맛있어요?』 뜨겁고 향기로운 수프는 정말 맛있었다.한 그릇다 비운 것을 보고 그는 몹시 감격하는 눈치였다.
『미스터 그린의 부인은 편하시겠어요.이렇게 조리를 도와주시니….미국에 계시나봐요.』 그의 아내는 이 집에 사는 것같지 않았다. 『아내는 없습니다.이혼했지요.』 미스터 그린은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간단히 한마디하고 당부했다.
『로빈이라고 불러주십시오.「콕 로빈」이라 하시든가….제 별명이지요.요리 잘 한다해서 그렇게 불립니다.』 그는 쾌활했다.
「로빈」은 「울새」의 영어다.주홍색 목덜미와 가슴을 지닌 울새는 그 빛깔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는 새다.「콕로빈」은「수컷 울새」인 동시에 「요리사 로빈」이라는 말도 된다.「콕(kok)」은 「쿡(cook)」의 네덜란드 말이다.
『혹시 네덜란드계 미국분이신가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로빈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리영은 조용히 웃음지었다.직감이 맞아들어간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할아버지대부터 인도와 교역했던 네덜란드 장사꾼 집안이었지요.』 『인도? 지금도 인도에 자주 가십니까?』 『가끔 갑니다.
인도엔 매력적인 미술품이 많거든요.』 『그래서 야크 목방울도 가지고 계시는군요.』 야크는 인도 북쪽의 네팔이나 티베트 등 고원지대에 사는 털이 긴 소다.놋쇠로 만든 왕방울을 목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그들이 어울려 다니는 장소를 확인하는 것이다.미스터 조가 세 들어 있던 골동품상에도 수북이 쌓여 있던 방울이다. 미스터 조.그를 만난지도 한참이나 됐다.그렇게 가슴 저며원했던 남자인데 새하얀 종이 대하듯 이젠 아무런 감정의 빛깔 없이 돌이켜진다.사랑이란 이처럼 허망하기만한 것인가.
『점술사 같은데요!』 로빈은 되풀이 감탄하고 있다.
『…저도 인도에서 살았었으니까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 가 있었던 시절 얘기를 했다.
미스터 로빈이 급속히 자신에게로 마음 기울이는 것을 아리영은또 하나의 직감으로 깨달았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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