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갈등이 불러온 뉴욕극장의 관객 폭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1호 10면

1847년 8월 4일 개관한 뉴욕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는 문을 연 지 2년 만인 1849년 4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미국 초연을 유치할 정도로 이름 높았던 명소다. 잘나가는 극장을 누군가 시기해서일까. 불과 몇 년 만에 아티스트와 관객 모두가 기피하는 곳으로 전락해 결국 간판을 내렸고, 도서관ㆍ강연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아예 아파트로 바뀌어 버렸다. 1849년 5월 10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공연 도중 극장 바깥에서 21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중상을 입는 유혈 참사가 일어났고 그 피비린내가 쉽게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의 무대이야기

당시 무대에는 영국 배우 윌리엄 머크리디(1793~1873)가 맥베스 역으로 출연 중이었다. 1만5000여 명의 인파가 아침부터 극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미국 출신의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에드윈 포리스트(1806~1872)의 지지자들이 라이벌 머크리디의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팬클럽이 나선 것이다. 근육질의 검투사 역을 즐겨 맡았던 포리스트는 하류층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이들은 3일 전 같은 공연에서 동전·달걀·레몬에 썩은 과일과 악취가 심한 진통제 약병을 머크리디에게 던졌다. 2층 발코니석에서 무대로 던진 의자가 머크리디의 발 앞에서 박살이 났다. 화가 난 머크리디는 더 이상 뉴욕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튿날 뉴욕 오피니언 리더 48명이 포리스트 지지자들의 난동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이들의 간곡한 호소와 지지에 못 이겨 머크리디는 5월 10일 단 하루만 무대에 서겠다고 했다. 포리스트의 팬들은 같은 날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고 시내 곳곳에 격문을 붙였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됐을까.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12분 거리에는1826년 개관한 바워리 극장이 있었다. 주변에 사는 아일랜드·독일·중국 이민자 출신의 하층민이 주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바워리엔 술집과 여관이 즐비했고, 애스터 플레이스가 위치한 브로드웨이엔 고급 주택가와 호텔이 들어섰다. 말하자면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는 부유층이 하층민과 극장에서 한데 섞이기 싫어 새로 지은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바워리 주민들에게 위화감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포리스트는 이 점을 이용해 라이벌 배우가 뉴욕 무대에 발을 못 붙이도록 시위를 부추겼다.

머크리디의 공연 소식을 접한 포리스트는 바워리 극장에서 ‘맥베스’로 맞불을 지폈다. 같은 작품으로 머크리디에게 도전하겠다고 언론에도 알렸다. ‘머크리디와 포리스트, 맥베스 역으로 맞대결’ 제목을 단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그도 모자라 포리스트의 팬들은 머크리디가 공연 중인 극장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두 명의 라이벌 무대는 결국 영국 출신의 귀족계급과 하층 서민의 불화로 번져 미국 군대가 미국인에게 발포하는 웃지 못할 비극을 낳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