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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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애소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못하도록 아예 「약혼녀」라는 여성을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시동생의 꾀가 얄미웠다.그렇다면 이쪽에도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이 여성 앞에서 애소 얘기를 꺼내는 방법이다.
『형수님께 인사 드리시지요.』 시동생의 예의바른 지시에 「약혼녀」는 다소곳이 절했다.발랄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인상이 좋았다. 말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의사표시는 분명히 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식단을 들여다보고 묻는 시동생에게 아리영은 머뭇거렸다.일본에서 한국음식 들기는 처음이다.
『글쎄,뭐가 좋을까요? 냉면은 어떨까?』 속이 타서 시원한 음식을 들고 싶었다.
『이 집 냉면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인스턴트 국수로 만들기 때문에 물컹해서 맛이 없습니다.갈비살 구이에 우거지국을 드시는게 좋으실 것같은데요.』 그녀가 권한대로 하고 맥주도 주문했다.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시킨 것인데 세개의 유리컵에 가득히 맥주를 채우자 시동생이 잔을 높이 들어 말했다.
『우리의 약혼을 축하하러 나와주신 형수님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약혼녀」도 잔을 들고 있다.마지못해 잔을 낮추어 들어건배(乾杯)했다.능욕당하는 기분이었다.애소도 이런 식으로 몸을허락해버린 것일까.
그러나 애소에 비기면 이 여성은 월등히 세련돼 보였다.학식도상당하고 집안도 나쁘지 않고 유복하기까지 하다.실은 그새 이런신부감을 수소문하고 다녔던 것인데,엉뚱한 일이 저질러졌으니 어찌해야 하는가.아리영의 마음은 조금씩 그녀에게 기울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은 불고기 굽는 열기로 가득했다.그 열기 속에 한국어의 회오리가 돌고 있다.이곳은 바로 「일본 속의 한국」이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예약한 테이블로 안내받는 그들을 언뜻 바라보다 놀랐다.
우변호사가 아닌가.
아리영은 얼른 얼굴을 내리깔았다.
가스 테이블의 석쇠 위에서 갈비살이 지글대고 있었다.
우변호사는 아리영을 눈여겨보지 못한 것같았다.일행은 종업원을따라 구석진 테이블로 갔다.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자리였다.
동행한 여자의 코트를 벗겨 종업원에게 넘기는 자연스런 몸짓으로 보아 우변호사와 그녀는 절친한 사이로 보였다.이것이 생시인가.아리영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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