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두 여성지도자 지아.하시나 反目 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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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방글라데시의 두 여걸 베굼 칼레다 지아 총리와 셰이크 하시나제 1야당 당수간의 진검(眞劍)승부는 어느 쪽도 확실한 승자가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16일 총선결과 지아총리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이 의석의 3분의2를 넘는 2백14석을 확보,압승했음에도 야당측이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시나 아와미연맹당 당수는 『투표율이 워낙 낮기 때문에 이번선거는 무의미하다』며 『사실상 승리자는 오히려 우리』라고 큰소리 쳤다.
공식발표는 없지만 선거감시원들은 투표율이 15%를 넘지 못할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하시나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투표거부 운동을 벌였다.
지아 총리 정부는 군병력 30만명을 전국 투표장에 배치,투표를 유도했지만 야당운동원들의 선거불참 호소가 곳곳에서 폭력사태로 이어져 선거는 피로 얼룩졌다.선거 당일만 해도 16명이 사망하고 5백명 이상이 부상했다.
하시나 당수는 선거가 끝난 뒤 『중립내각이 관리하는 새로운 총선을 90일 내에 실시하라』고 요구하고 이슬람교의 라마단이 끝나는 24일부터 대규모 파업 계획도 밝혔다.
하시나 당수는 이번 파업을 71년 방글라데시 독립당시 부친이파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벌였던 「비협력 운동」에 비유했다.하시나의 부친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75년 군사쿠데타 와중에 암살됐다.
지아 총리와의 구원(舊怨)도 되새겼다.지아 총리는 77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암살된 지아 울 라만 전대통령의 미망인.
부친과 남편이 이끌던 당을 각각 물려받은 두 여걸은 한때 군사정권에 맞서는 동지였지만 지아 총리가 집권한 91년이후 사사건건 충돌했다.특히 하시나 당수가 93년4월 『71년 독립전쟁당시 파키스탄군에 협력하고 학살을 자행한 골람 아잠을 특별재판에 회부하라』고 요구했지만 지아 총리가 반대,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특별법 공방끝에 야당은 94년 3월 등원거부와 함께 지아총리 퇴진및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고 94년 말에는 야당의원전원이 의원직을 총사퇴했다.
이에 굴복한 지아총리가 총선 실시 1개월전 중립 과도정부하에서 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한 바 있지만 약속이행을 거부한채 폭력과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를 치러 방글라데시 정국혼란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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