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사진' 안 되는 선거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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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식 사진부 기자

"찍을 것도 없고 찍기도 어렵다."

17대 총선 취재에 나섰던 기자는 지난 1주일 내내 무력감에 시달렸다. 출장 첫날. 경남 남해-하동의 한 후보를 찾아가 간곡하게 동행을 부탁했다. 그럴듯한 유세 장면을 잡을 줄 알았더니 웬걸. "사람이 있어야 사진을 찍죠?" 후보의 푸념이 처음에는 엄살인 줄 알았다.

사람이 여럿 모이기는커녕 지나가는 사람만 보이면 후보는 유세 차량을 세우고 마이크를 잡았다. 텅 빈 마을을 향해 스피커 볼륨을 올리기도 했다. 동네마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됐다.

노인층이 많은 농촌의 경우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유권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울뿐더러 주요 선거운동 수단으로 떠오른 인터넷은 그림의 떡이다. 후보들은 유권자를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르텄다. 후보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사진기자에게도 하루해는 짧기만 했다. 어렵사리 '그림'되는 사진을 한장 건져도 선거보도 준칙이 발목을 잡았다. 우선 사진 속에 특정 후보의 얼굴이나 기호가 드러나면 안 된다. 심지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후보의 표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늘 후보의 뒷모습만 찍기 일쑤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까다로운 선거법 때문이다. 현행 선거법에는 일렬로 무리지어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선거운동원 수는 후보와 동행할 경우 5명, 운동원만 있을 경우 2명으로 제한돼 있다. '장'이 서지 않으니 청중보다 후보와 운동원 수가 더 많은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운동원보다 선관위 직원과 경찰, 시민단체를 비롯한 감시원이 더 많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만나는 후보마다 "선거법이 복잡하고 엄격해 정상적인 선거운동까지 위축시킨다"고 푸념했다.

이번 4.15 총선은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운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규제 위주의 엄격한 선거법이 후보자의 '입'을 막아선 곤란하다. 선진국에선 돈 흐름을 엄격하게 규제하면서도 후보자의 입은 막지 않는다. 후보자와 유권자의 접촉이야말로 선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선거규제가 무관심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춘식 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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