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포 탈출하기 <27>밝혀도 너무 ‘밝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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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15면

여인은 등잔을 밝혀 방 안을 밝히고는 밤을 꼬박 밝히며 남편을 기다린다. 노름을 밝히는 남편은 한 달에 한 번쯤 이삼 일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일에선 사리를 분명히 밝힐 줄 아는 사람인데…. 여인은 신경을 밝혀 문밖의 기척을 살핀다.

용례를 예시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이 글에서 여섯 개의 ‘밝히다’는 뜻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오늘 다루려는 것은 이런 용법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내용·생각 따위를 알리다. 어떤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리다’를 의미하는 ‘밝히다’다.

무엇을 ‘밝히는’ 게 아닌데도 단순히 ‘말하다’가 거듭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는 진부한 말을 인용해 놓고 의미를 더하려고 이 동사를 쓰는 게 문제다. 뻔히 아는 사실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소감, 원론이나 상투적인 얘기, 알리는 것 이외의 의도가 짙은 말 따위엔 ‘밝히다’가 어울리지 않는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자전거나 스쿠터·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겠다”고 밝혔다. : ‘말했다’면 된다.

▶인천 연수지구의 부동산 중개인 A씨(45)는 “9월 말 오피스텔에 대한 전매금지가 실시되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찬스인 것 같다”고 밝혔다. : A씨로서는 ‘밝힐 만한’ 내용일지 몰라도 ‘말했다’로 충분하다.

▶외환위기 전의 단기 외채 증가는 종금사 등이 단기 외채를 조달해 장기 시설 투자에 사용하는 바람에 유동성 위기를 부른 것이라고 이 장관은 밝혔다. : 외환위기 직후에 다 알려진 얘기다. ‘말하다’나 ‘분석하다’가 어떨까.

▶WHO는 공항 말라리아는 정확한 진단과 감염 경로 추적에 한 달 이상 걸리기 때문에 제때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특히 말라리아 유행 지역에서 도착하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해충 구제 등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앞에 ‘지적하고’가 나왔기 때문에 뒤에선 ‘밝혔다’를 쓴 듯한데, 밝히기엔 너무 원론적인 얘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