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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의 핵과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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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전쟁이 터지고 눈깜짝할 새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일군의 과학기술자들이 평양행 열차에 몸을 싣고 38선을 넘어갔다. 그 가운데엔 당시 서울공대 학장 이승기 박사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1939년 합성섬유 ‘비닐론’(북한식 명칭 비날론)을 발명해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화학자였다.

비닐론 발명은 “캐로더스의 나일론 발명에 3년밖에 뒤지지 않은 우리 민족 과학자의 쾌거”로 평가(진정일 고려대 석좌교수, 『과학, 그 위대한 호기심』)될 정도로 학술적으론 뛰어난 업적이었지만 실용화 과정에선 나일론에 밀려 북한 이외의 지역에선 빛을 보지 못했다.

이승기 박사는 북한 핵개발의 초창기 과정에도 참여했다. 60년대 영변에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은 것이다. 북한은 당시 소련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어 가동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79년 5㎿급 원자로를 착공해 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오늘날까지 두 차례의 핵위기를 일으키며 플루토늄을 만들어 낸 바로 그 원자로다.

이 박사와 같은 1세대 월북 과학자들이 씨를 뿌린 북한 핵개발을 본격 궤도에 올려놓은 건 소련에 유학한 2세대 과학자들이었다. 북한은 영변 원자력연구소 설립 이전인 56년 소련과 원자력 연구협정을 맺고 모스크바 인근의 드브나 연구소에 과학 엘리트들을 집중적으로 파견했다. 90년대 초반까지 소련에서 핵기술을 습득한 인력은 300명가량에 이른다. 대표적인 이가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서상국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강좌장이다. 98년 그의 회갑 때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일상을 차려 보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지난달 27일 영변의 냉각탑 폭파 당시 TV 화면에 잡힌 이용호 원자력연구소 담보처장 역시 소련에서 기술을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나란히 서서 냉각탑 폭파를 지켜본 성 김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폭파 순간 그의 얼굴에 ‘깊은 감정의 동요’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영변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그는 “이곳의 모든 시설이 자식과도 같다”는 말을 취재진에 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냉각탑 폭파는 자식을 잃는 슬픔과도 같았을지 모른다. 더구나 국제적 압력을 버텨내고 서방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지켜온 핵시설이니 그 애착은 오죽했겠는가.

이 처장은 폭파 후 “냉각탑 폭파가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하길 바란다”는 말도 남겼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깊은 슬픔’이 그러하듯 ‘평화와 안정’에 대한 발언도 오롯한 진심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 입증은 북한 당국의 몫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