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holic 기자의 역사 산책길 - 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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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백제에 관해 말해주는 몇 가지 것들

지난번 풍납토성에서 못 다한 백제로의 시간여행은 송파구 석촌동에서 다시 이어진다. 백제의 흔적들이 석촌동에 흩뿌려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제전기(한성백제)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지만, 무덤은 당시의 매장풍습과 사회상, 문화상 등에 관해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그 중에는 고구려 장수왕릉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도 있다. 이쯤이면 발걸음을 재촉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백제 초기의 무덤들이 발굴된 석촌동의 백제 고분을 찾아 가기 위해선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내려야 한다. 6번 출구로 나와 쭉 걸어 가다보면 왼쪽에 한솔아파트를 지나게 되고, 그 길의 끝에 돌담이 하나 나온다. 사적 제243호인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은 바로 그 돌담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돌담을 따라 양쪽 어느 길로 가든 출입문이 나온다.

하나의 공원으로 조성된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에는 가족 산책객들이 많았다.

주택가 한복판에 높은 돌담으로 둘려 쌓인 고분군은 인근 지역 주민이 아니라면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유적지라기보다 지역 주민들을 위한 작은 공원과 같은 모습이었다. 푸른 소나무와 사이로 오롯하게 난 산책로는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나온 사람들의 주 코스가 되어 있었고, 이름모들 야생화들이 뒤덮인 잔디밭은 한낮의 볕과 오수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안내지를 손에 들고 줄지어 선생님을 뒤따르는 어린 학생들만이 이곳이 유적지임을 알게 하였다. 그나마도 각각의 무덤을 설명해주는 표지판이 부족해 이것이 어떤 무덤인지를 구분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선생님을 따라 견학 나온 학생들이 즐거운 모습.

현재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 위에는 8기의 무덤이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1917년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돌무지무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지역이 돌이 많아 ‘돌마리’로 불릴 정도였겠는가. 이뿐 아니라 흙으로 쌓은 무덤까지 합하면 80기가 넘는 백제인의 무덤이 남아 있었지만, 이 주변이 개발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무덤들은 파괴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도시와 문명이 공존하듯 빌딩 숲 안,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한 백제 고분군.

현재 남아있는 8기의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은 3호분으로 길이 55.5 m·높이 4.5 m에 이른다. 높이는 고구려의 장수왕릉(장군총)보다 낮지만, 규모는 고구려 장수왕릉을 능가한다. 장수왕릉과 같이 돌을 쌓아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꼭대기로부터 약간 아래쪽에 시신을 넣는 방이 있는 내부 구조도 같다. 이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소서노의 후손(비류와 온조)이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무덤이 백제의 최강성기를 이끌었던 제13대 근초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는 제3호분.

3호 남쪽에 있는 4호 무덤은 겉모습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닮았으나, 흙을 다져 무덤 안쪽을 만들고 바깥에 돌을 쌓아 올리는 식으로 쌓는 방식이 달랐다. 이는 백제 토착민의 매장 풍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적석총과 백제의 매장 풍습이 어우러진 4호분.

이 외에도 즙석(葺石)을 덮고 흙을 쌓아 분구를 축성한 봉토분, 지표에 장방형 토광을 파서 묘광을 만든 토광묘, 그리고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을 이룬 고분 등 구조형식과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고분 6기가 더 있다.

객원기자 최경애 doongj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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