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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골프장이 더 좋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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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행을 떠나 올 당시엔, 유럽과 미국 전역의 골프장을 속속 들이 경험해보고 어느 지역 어떤 골프장이 제일 좋은 지 직접 검증해 내겠다는 당찬 포부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미션인가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흡사 이제 막 말을 시작한 갓난쟁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질문이다.

엄마는 엄마라서 좋고 아빠는 아빠라서 좋다. 잘 나가는 골프장은 당연히 그 유명세 값을 해서 좋고 이름 없는 골프장은 탑 랭킹 골프장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만의 색깔과 향기로 나름의 매력을 발산해서 좋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우린, 캐디 없이 달랑 스코어 카드 한 장에 야디지 북 한 권을 들고 직접 코스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채를 선택하고 트롤리를 끌고 필드를 누비게 된다. 덕분에 누구의 중재도 없이 골프장과 직접 맞짱 뜨고 엎치락 뒤치락 한바탕 몸 싸움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처음엔 매일 채를 끌고 18홀을 걷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12홀 정도에 이르면 하체가 흔들리곤 했지만 서서히 종아리 근육이 단단해 지더니 제법 이력이 붙는 듯 했다. 몸이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걷는 골프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끌고 지고 걷는 골프의 장점은 골프와의 부대낌을 최대화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흡사 가이드를 동반한 패키지 여행과 혼자 배낭 매고 꺼나는 자유 여행의 차이와도 같고, 상대방 집안이며 개인 신상을 속속들이 알고 만나는 중매와 맘 고생 하며 하나씩 알아가는 연애의 차이와도 같다. 비록 힘도 들고 시간도 걸리지만 골프와 지지고 볶으며 18홀을 뒹굴다 보면 어느새 골프장은 아주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으로 느껴진다. 정말 골프장은 사람과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못난 사람이건 잘난 사람이건 나름대로 매력을 갖고 있듯 골프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꾸역꾸역 5년의 구력을 채우는 동안 약 40여 개의 골프장에서 100번 정도의 라운드를 했다. (어려운 형편에 최선을 다해 골프를 모시고 살았다.) 누군가 그 40여 개 골프장의 순위를 매기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손가락을 접으며 탑 랭킹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그 골프장들을 제대로 겪어보지도 못하고 대충 겉만 핥아보았기에 도리어 냉정하게 칼자루를 휘두르며 ‘평가’와 ‘순위’를 언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곳에서 우린 준비 없이 골프장을 만나게 된다.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른 골프장도 있고, 낯선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찾아가는 골프장도 있다. 사전 정보가 없기에 선입견도 없고 캐디가 없기에 직접 몸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골프장에서 18홀을 마치면 ‘객관’의 저울을 거의 작동을 멈춘다.

Wales에서의 날들이 끝을 달리고 있을 무렵, 우린 극 대 극 골프장 두 곳을 경험하게 되었다. Wales National Golf Course와 Newport Links Golf Club, 사실 객관적으로는 동등한 비교 선상에 놓일 수 없는 골프장이다. Wales National Golf Course는 웨일즈에서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골프장이다. 영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긴 골프장 중 하나로 블루티의 경우 7,450야드에 달하는 챔피언십 사이즈의 Inland 골프장이다. 심지어 607야드의 파5홀인 두 번 째 홀은 웨일즈에서 가장 긴 홀이라고 한다. 총 36홀 규모의 골프장은 물론이고 대규모 호텔과 스파 및 기타 레저 위락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리조트형 골프장에 잔디 상태도 완벽했고 매 홀 나무들이 우거진 폐쇄성은, 우리나라로 옮겨놓으면 곧바로 탑10 랭킹에 등극할 만큼 한국 골퍼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Newport Links Golf Club은 웨일즈에서 아일랜드로 건너가는 카페리를 기다리기 위해 찾아간 항구에서 배 시간이 많이 남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찾아간 9홀 골프장이었다. 잔디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바다를 끼고 펼쳐진 전망이 압권인지라 그 곳에도 리조트가 들어서는 모양인지 9홀 추가 공사가 한창이었다. 덕분에 클럽하우스는 컨테이너 박스 수준이었고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메뉴는 고작 쵸코렛바 하나였다. 9홀 3089야드, 18홀로 환산해도 겨우 6000야드를 넘기는 수준이다. 1번 홀 티잉그라운드에 서면 9홀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전 홀에서 몇 명이 라운드 하고 있는 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모든 홀이 나무 한 그루 없이 개방되어 있고, 조금이라도 샷이 휘면 옆 홀에 민폐를 끼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눈부신 바다를 끼고 펼쳐진 링크스, 홀마다 방향을 바꿔가며 휘몰아치는 바람, 덕분에 서로 남의 홀을 넘나들다 보니 앞 팀 뒷 팀이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분명히 객관적으로는 비교를 할 수 없는 두 골프장이지만 누군가 어느 골프장이 더 좋았냐고 묻는다면, “다 좋았습니다.”
비록 변변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의 매력이 있고, 그것은 아무리 잘 난 사람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만의 매력이듯 골프장이 딱 그런 것 같다.

세계 100대 골프장의 아우라도 대단하지만 이름없는 시골길 목장 옆 골프장이 발산하는 매력은 100대 골프장이 흉내 낼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