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북한>1.좌절.긴장 그리고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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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정일(金正日)은 왜 권력승계를 늦추고 있는가.식량은 버틸 만한가.북한체제는 과연 얼마나 존속될까.중앙일보 통일문제연구소는 김일성(金日成)사후 북한 내부사정을 보다 가까이에서 알아보기 위해 지난해말 5명의 기자를 미국.일본.중국. 독일 등 4개국 17개 도시및 지역에 파견,최근 북한을 다녀온 동포등 69명의 해외인사를 1개월여에 걸쳐 밀착취재했다.
[편집자註] 『내가 우리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은 이제끝났다.』 한 무리의 이국(異國)처녀들이 깔깔대며 장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노인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그러자 그 옆에 서있던 한 동포(중국거주)는 깜짝 놀랐다.그 노인은 바로 북한 최고위층 지도급 인사였기 때문이다.평생을 바 쳐쌓아온 그 나름의 노력과 신념이 외국에 나와 생기 넘치는 처녀들의 웃음소리에 꿈을 깬 듯 싸늘한 환멸로 드러난 것이다.이 동포는 그 때 북한인사의 주름진 얼굴과 온몸이 좌절감으로 휩싸인듯 갑자기 아주 초라하게 보였다고 말했다.김 일성 사망이후 1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그 노인은 세계의 변화하는 물살속에 김일성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경직된 이념도 죽은 것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토로하고만 것이다.
『스위스나 덴마크 같은 나라가 우리가 도달하려고 했던 목표였다.레닌이 꿈꾼 이상적인 국가가 바로 그러했다.그러나 우리는 스탈린노선을 따랐다.결국 오늘과 같은 결과가 되고만 것은 스탈린노선 때문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다른 북한인사는 북한이 오늘날 도달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그러나 그 현실이 희망과는 다른 반대편의 언덕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정신병자와 다름없다.하나밖에 모른다.』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공산당원 출신의 한 동포(중국 거주)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그 「하나」란 다름아닌 주체사상이다.『무엇보다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그렇지 못한 권 력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개혁.개방 이후 비로소 「사업」에 눈을 뜬 이 동포는 북한주민의 생활고에 진정으로 가슴아파했다.그는 식탁 위에 먹고 버린 조개껍질을 들면서 『북한경제는 이렇게 텅비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과학원 연구원들의 공식입장은 다르다.『주체사상은 외부에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같다.주체사상은 사회과학적이론 가운데 하나이면서 국내에서는 종교까지 포함하고 있다.세계의 종교들은 평화.사랑.영생 등을 추구하는 공통 점을 가지고 있다.다만 종교가 영생을 내세에 구하는 반면 우리는 현세에서 이루자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들과 토론한 한 동포(중국 거주)는 이들이 주체사상을 외부세계에는 과학적 이론으로,내부적으로는 종교로서 이용하는 양면성을 지닌 것으로 설명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아무도 「사상이 곧 종교」라고 태연하게 주장하는 「과학원」사람들과 논 쟁하려 들지 않는다.북한에서는 그것이 오래고도 유일한 사상체계이자 여전히 『김일성의 혼이 김정일에게 들어가고,그러면 김정일이 바로 김일성이 된다』는 신앙이 유효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수대 언덕 김일성 동상 앞에 지난해 12월초 추위에 아랑곳 없이 5,6천명이 애도를 표시하고 있었다.할머니 한 분이 퍼질러 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미국 동포) 『애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님은 영생하신다」고 믿는듯한 분위기였다.』(독일 동포) 『북한은 바깥으로 잠겨있을 뿐 아니라 안으로도 철저히 잠겨있는 체제다.일반주민들은 외부소식을 알 길이 없다.설사 알고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형편이 아니다.발설자는 역으로 추적돼 철저히 색출된다.물방울이 모여 홍수가 된다거나 눈덩이가 굴러 눈사태가 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중국 동포)외부세계의 변화와는 유리된 북한에서 주민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이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양에서 3년간 살았지만 평소 북한 사람들이 소박하고 친절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다.그러나 지난해 3월 준전시상태가 선포됐을때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느꼈다.경보사이렌은 예고없이 불시에 울렸다.그런데도 2~3분이 채 안 돼 평양거리는 단 한사람의 인적도 없는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힘겹게 짐을 이고가던 할머니조차 순식간에 지하대피소로 사라지는 모습에서 전율했다는 한 외교관은 북한은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바깥 사정은 몰라도 북한주민들이 새롭게 나선 김정일체제에 거는 기대는 크다.
『그는 담이 크고 배짱이 세다.성격도 팍!팍!팍!하여 칼로 벤 듯 시원시원하다.한번 밀고나가면 끝까지 한다.인민생활에 신경쓰고 있는데 한번 한다면 해낼 것이다.큼직큼직한 조처가 잇따라 나올 것이다.』 김정일의 측근에서 일반인까지 교류의 폭이 넓은 한 동포(미국 거주)는 지도층은 지도층 나름으로,인민들은인민들 나름으로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며,그만큼 김정일체제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기대의 바닥에는 「개혁」의 요구가깔 려있음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오랜 어둠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와 본 북한사람은 그가 몸담은 체제에 절망한다.그러나 그 안에 있는 절대다수는 여전히 이념적인 통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나마 변화가 있다면 물질적으로 조금 생활형편이 나아지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①좌절,긴장 그리고 기대 ②『金日成은 살아있다』 ③효자둥이는충성둥이 ④「장군님」의 軍心 달래기 ⑤식량난의 허실 ⑥「수용소」식 경제특구 ⑦金正日 치하의 민심 ⑧체제유지 자신감 있나 ▶중국=전택원 부장 ▶일본=방인철 부장 ▶美서부=안희창 기자 ▶독일=유영구 전문기자 ▶美동부=김용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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