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유로 2008 … 조국에 비수 꽂은 포돌스키·히딩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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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와 오스트리아가 공동 개최한 유로 2008이 30일 새벽(한국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독일-스페인의 결승전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유로 2008이 지구촌을 열광시킨 것은 녹색 그라운드 위에서 뽐내는 경기력뿐 아니라 그 속에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계 독일인 포돌스키와 터키계 스위스인 하칸 야킨은 새 조국의 유니폼을 입고 핏줄 속 조국과의 대결에서 골을 터뜨렸다. 이들은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펼치기는커녕 축하하기 위해 쫓아오는 동료들을 굳은 표정으로 물리쳤다. 현대 사회에서 국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쾨비 쿤 스위스 감독의 가슴에는 폭풍우가 쳤다. 대회 직전 아내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축구 인생의 마지막 도전인 유로 2008을 위해 팀으로 돌아왔다. 감독의 아내는 터키와의 조별리그 2차전이 열릴 때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2연패를 기록하며 8강 진출이 좌절됐다.

쿤 감독은 “두 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터키전 패배는 너무도 쓰라렸지만 아내의 회복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들은 쿤 감독의 은퇴 경기였던 포르투갈전에서 승리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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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크로아티아의 8강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터키는 연장전 종료 7초 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종료 1분을 앞두고 골을 뽑아내자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던 빌리치 크로아티아 감독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 졌다고 생각했던 터키는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4강 기적을 일궜다. 39세로 이번 대회 최연소 감독인 빌리치가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그래서 골을 넣은 직후 선수를 교체해 시간을 벌었다면 4강 주인공이 바뀔 수 있었다.

호날두(포르투갈)를 위한 대회가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지만 그는 8강에서 독일에 패한 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그의 빈 자리에 당돌한 축구 천재 아르샤빈(러시아)이 등장했다. 네덜란드와의 8강에서 판데르사르의 가랑이 사이를 뚫는 골을 터뜨린 그는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의 세리머니로 팬들의 머릿속에 도장을 찍었다.

거스 히딩크 러시아 감독은 한마디 말이 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1-4로 패한 뒤 그는 “러시아의 어린 선수는 3일 만에 3년치를 배울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의 말처럼 며칠 새 확 달라진 러시아는 3연승을 내달리며 단숨에 4강까지 올라섰다.

반면 도메네크 프랑스 감독은 이탈리아에 패해 8강 진출에 실패한 직후 자진 사퇴 등 거취에 대한 질문을 받자 “지금 내 머리는 여자친구와의 결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축구 최악의 날에 “인생에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고 덧붙인 그는 아직도 횡설수설하며 감독에서 물러나라는 여론에 맞서고 있다.

빈(오스트리아)=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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