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냉각탑 폭파’까닭은 눈으로 보여주는 핵 불능화 ‘통 큰 이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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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고 이를 생중계하기로 한 건 북한 핵 활동의 주축인 5㎿ 원자로를 더 이상 가동하지 않겠다고 전 세계에 밝히는 일종의 선언식이다. 6자회담 합의사항을 존중하고 비핵화를 성실히 실천하고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북한이 얻게 될 반대급부, 이를테면 테러지원국 해제와 같은 상응 조치를 되돌릴 수 없게 굳히는 의미도 있다.

당초 냉각탑 폭파는 6자회담에서 합의된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북한이 합의한 건 영변 핵시설의 핵심 부품을 제거해 원자로가 제 역할을 못하도록 하는 불능화였다. 자동차에 비교하면 폐차를 하는 게 아니라 엔진을 들어내 자동차가 못 굴러가게만 하는 것이다. 북한 당국자의 표현대로라면 “황소를 죽이진 않고 거세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불능화가 상당히 진척된 현 단계에선 냉각탑을 폭파하든 그대로 두든 실질적 차이는 없다. 다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로서의 효과가 큰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낸 건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라고 한다. 한국의 천영우 전 6자회담 수석대표도 “뭔가 통 크게 눈에 보이는 쇼를 한번 해보라”며 옆에서 거들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강한 냉각탑 폭파 쇼는 북·미 간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북한으로선 부시 행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가능한 한 비핵화 단계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계산도 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6자회담 협상의 전반적 방향이 북측에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더라도 북·미 관계 진전이 계속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6자회담 합의를 믿고 냉각탑까지 폭파했으니 이제 뒷일을 책임져라”며 차기 미국 행정부가 대북 강경책으로 돌변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미국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미국은 6자회담에 회의적인 의회와 행정부 내의 강경파를 설득하기 위한 정지작업 차원에서 이런 이벤트가 가져올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CNN의 생중계로 북한의 냉각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보게 되면 북한이 6자회담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는 여론이 미국 내에서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테러지원국 해제에 반대하는 의회의 강경론자들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각탑은 북한의 원자로를 가동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이지만 미국에서도 북한의 핵 활동을 파악하는 유용한 도구였다. 냉각탑의 굴뚝에서 수증기가 나오는지 여부를 위성사진으로 판독하면 원자로 가동 여부를 추론하는 유력한 단서가 된다. 지난해 2·13 합의 이후 원자로 가동이 중단된 사실도 미국은 냉각탑을 찍은 위성사진으로 확인했다.

물론 영변의 핵 시설 자체가 워낙 노후화돼 있어 북한으로서는 이를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반대급부를 챙기는 게 더 이익이란 분석도 있다. 영변 핵 시설을 불능화하고 그 대가로 100만t 상당의 에너지 보상을 받기로 한 2·13 합의 자체가 그런 이해타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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