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총칼 피하려 여자아이 행세 ‘오키나와 소녀’의 마지막 반전 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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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만행을 일반인에게 전해 온 ‘오키나와 소녀’ 오시로 모리토시의 어렸을 때 사진. [『이것이 오키나와 전쟁이다』 저자 오타마사히데 제공]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 일본인들에게 범한 만행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데 몸 바쳐온 오시로 모리토시(大城盛俊·75)가 21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石垣)섬에서 마지막 강연을 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전했다. 63돌을 맞은 오키나와 피해자 ‘위령의 날’ 이틀 전이었다. 그가 25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 강연은 1230여 차례. 매주 한 번꼴이었다. 그러나 부인 병간호를 하고 있는 데다 자신의 발목 관절도 약해져 공식 강연은 이번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는 이날 “처음 강연할 때는 ‘오키나와가 미국에 있나요’라고 질문하는 어린이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과거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모르는 일본인이 많았다는 뜻이었다.

그가 오키나와 전쟁 증언에 앞장서게 된 계기는 1984년에 나타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오키나와 류큐(琉球)대 교수였던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전 오키나와 지사가 오키나와의 비극을 고발하는 책을 내면서 ‘넋을 잃은 눈동자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책 표지에 게재한 오시로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오시로는 “사진 속 인물은 나 자신”이라고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증언 인생은 소년이 소녀로 둔갑한 사연에서 시작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5월. 오시로는 12살 소년이었다. 일본군이 남자 아이들을 보이는 대로 데려다 일을 시키고 방해가 되면 서슴없이 살해하자 그의 아버지는 오시로를 여자 아이로 변장시켰다. 그의 머리를 단발머리로 자르고 여자 아이의 옷을 입혔다. 그런 뒤 동굴에 숨어 지내던 중 일본군이 찾아왔다. 일본군은 오시로가 흑사탕을 넣어둔 손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묻다가 “어린것이 말을 안 듣는다”면서 오시로의 얼굴을 군홧발로 찼다. 다음 날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오시로를 치료했고, 이때 찍힌 사진이 ‘넋을 잃은 눈동자의 소녀’(사진)라는 이름으로 책 표지에 쓰인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된 후 오시로가 전국을 돌면서 한 강연의 핵심은 ‘반전(反戰)’이다. 그는 “내가 정말 호소하고 싶은 것은 일본군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던 전쟁의 광기”라며 “베트남 전쟁도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도 처음에는 오키나와 주민에게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순순히 일본군에게 거처와 식량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하지만 미군 상륙이 임박하자 일본군은 공포에 떨며 광기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도로와 진지 구축에 주민을 동원하더니 참호에 억류했다. 그 바람에 미군의 포탄이 떨어져도 민간인은 도망가지 못했고, 일본군이 참호 밖으로 나갈 때면 주민을 앞에 내세워 인간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게 오시로의 증언이다.

일본군에게 폭행당해 실명한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경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다른 동굴에서 내(오시로)가 있던 동굴로 돌아오던 중 일본군에 붙잡혀 미군 스파이로 의심받았다. 일본군은 어머니를 동굴에 가두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후두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인공발성기를 사용해 강연을 해왔다. 전기 장치로 목소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그의 강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쳤다. 그는 “오키나와의 하늘은 푸르지만 아픈 과거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면서 고별 강연을 끝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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