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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마법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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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들은 연장전까지 120분간 지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은 승리를 거뒀다. 지난 22일 스위스 바젤에서 벌어진 유로 2008 8강전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패퇴시키고 4강에 오른 러시아 축구팀 얘기다. 러시아팀의 벤치에는 어퍼컷 세리머니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있었다. 유럽축구의 변방 러시아팀의 놀라운 선전은 흡사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한국 대표팀을 보는 듯했다. 한국·호주·러시아 대표팀을 연이어 맡아 승승장구해온 히딩크의 마법 같은 리더십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한국 국가대표팀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북한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마지막 조 예선전을 치렀다. 두 팀 모두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은 터라 이날의 승부가 큰 의미를 갖지는 못했지만 한국팀은 경기 내내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한 끝에 득점 없이 비겼다. 사실 한국 대표팀은 그 이전에도 조 예선 내내 한 수 아래의 약체 팀들과 붙어서 이렇다 할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 4강팀의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졸전의 연속이었다. 히딩크가 떠난 후 그의 마법도 다 풀린 모양이다.

이명박팀은 5년 임기를 시작한 지 단 3개월 만에 좌초의 위기를 맞았다. 축구로 치면 90분 경기 중 채 5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실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 선수 선발 때부터 잡음이 들렸다. 부정선수와 무능선수가 대표팀에 뽑혔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그래서 몇몇 선수가 경기를 해보기도 전에 교체됐다. 감독은 기량만큼은 누구에게 견줘도 뒤지지 않을 최정예 선수를 뽑았으니 한 번 믿고 맡겨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선수 선발에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한 선수가 있는가 하면, 팀 플레이를 외면하고 단독 드리블만 일삼는 선수도 있었다. 감독만 쳐다보고 뛰다가 공을 놓치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그러자 감독은 그동안 비밀리에 연마해온 개방 전술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전술을 펼쳐야 할 핵심 선수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공을 뺏기고 말았다. 관중들의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감독은 고집스럽게 똑같은 전술을 고집했다. 급기야 관중석에서 물병과 휴지가 그라운드로 날아들었다. 간간이 돌멩이까지 날아왔다. 벤치에 몸을 숨긴 감독은 다급하게 관중의 뜻에 따르겠다며 전술 변경을 지시했다. 그리고 경기 시작 5분 만에 주장을 포함한 수비수 전원을 교체했다. 그래도 관중의 야유가 그치지 않자 이번에는 공격수도 몇 사람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관중석에선 그만하면 됐다는 사람들과 아직 정신 못 차렸다는 사람들이 엉겨 붙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졸전이나마 90분 경기를 마쳤지만 이명박팀은 여전히 격전을 치러야 할 4년8개월의 임기가 남아있다. 할 수만 있다면 히딩크의 마법이라도 빌려와야 할 판이다. 그러나 히딩크 마법은 그다지 비밀스럽지도 않고 멀리 있지도 않다.

히딩크가 팀을 맡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제대로 된 선수를 고르는 일이다. 역시 인사가 만사인 것이다. 히딩크가 맡는 팀마다 용케도 가능성이 큰 선수들을 발굴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뛰어난 안목이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그가 외국인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해당국의 얽히고설킨 인맥에서 자유로웠기에 순수하게 능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또 한 가지는 자신만의 확고한 축구철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체력이 기본이라는 것, 팀워크를 중시한다는 점,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 등이 그것이다. 여기다 선수들의 심리를 꿰뚫고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소통의 달인이라는 점이 그를 축구계의 매직 맨으로 만들었다.

히딩크 리더십의 마법은 어찌 보면 싱거울 정도로 상식적이다. 다만 그 상식을 제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이명박팀은 이제 절체절명의 기로에 섰다. 이 대통령은 어떤 마법으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가.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