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사모펀드로 '떠도는 돈' 흡수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선거와 탄핵 정국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최근 중요한 금융제도 하나가 추진되고 있다. 사모투자펀드(private equity fund) 도입이 그것이다. 다수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조달하는 공모펀드에 비해 사모펀드는 투자자 수에 제약이 있지만 자산운용이 자유롭고 비밀을 보장받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공모펀드는 총자산의 10% 이상을 한 회사에 투자할 수 없지만 사모펀드는 이러한 제약없이 한 회사에 집중 투자해 경영권까지 인수할 수 있다. 한미은행 지분매각으로 7000억원을 벌어들인 칼라일,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 SK와 경영권을 다툰 소버린, 이헌재 부총리가 야인시절 추진했다 지금은 백지화된 '이헌재 펀드' 등이 모두 사모펀드의 일종이다.

*** 추진 목적 둘러싼 논란 왜곡

최근 재정경제부는 외국자본의 국내 기업 인수.합병에 대항하고 국내 기업의 헐값 매각을 막기 위해 사모투자펀드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부총리가 직접 나서 전경련과 금융사가 대형 사모펀드를 조성, 좋은 기업을 인수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사모펀드 제도의 악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A재벌이 B투신사에 사모펀드를 설정한 뒤 계열사인 C기업의 채권과 주식을 매입하면 내부자금 지원과 함께 계열사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을 회피할 수 있다. 금감원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서둘러 사모(私募)펀드 실태조사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모펀드를 둘러싼 논란을 보고 있으면 배가 다른 곳으로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이 제도 도입의 주목적처럼 오해되면 곤란하다. 사모펀드는 안전자산만 찾아 부동산과 은행권에만 맴돌고 있는 단기. 부동자금을 기업구조조정으로 유인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다. 지금 우리 경제는 벤처붐의 붕괴, 카드사 부실, 경기침체로 인해 부실징후 기업이 급증하고 있다. 자금난에 빠진 코스닥 기업이 한둘이 아니며 신보.기보의 신용보증이 연장되지 않으면 부도가 날 중소기업도 다수다. 자업자득이라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국민 모두가 위험투자를 기피해 이들을 외면하면 투자된 유형.무형 자산이 사라져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기존의 기업구조조정 제도는 이미 부도가 난 기업의 매각에 중점을 뒀기에 부실징후 기업 회생에 적합하지 않다. 다수의 투자자 보호를 위해 각종 규제가 부과된 공모펀드 또한 고위험 투자인 기업구조조정을 담당하기에 역부족이다. 따라서 투자대상에 제약이 없고 투자자와 운용자 간 성과보수도 유연하게 정할 수 있는 사모펀드 제도를 도입해 '건전한 투기꾼'을 기업구조조정에 끌어들일 필요가 생겼다. 즉 재벌과 대형 금융기관의 경영권 확보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제도 도입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외국자본의 국내 기업 인수와 역차별이 불만이면 출자총액제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기업구조조정이란 주목적과 관련없이 경영권 방어 기능을 강조하다 보면 사모펀드가 규제 회피수단이란 잘못된 인상만 남기게 된다. 계열사 지원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한 뒤 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할 때다.

*** 급하게 키우면 부작용 부를 것

또한 급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정부.전경련.금융사가 힘을 모아 사모펀드를 조성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을 돌아보면 금융산업이 갑자기 커지면 반드시 사고를 내게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벤처 육성과 코스닥 붕괴, 소비자금융 활성화와 카드사 부실이 대표적인 예다.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 그에 비례해 위험도 커지는 금융산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조업과는 달리 금융산업은 처음에는 우량고객만 상대하다가도 규모가 커지면 신용도 낮은 고객을 피할 수 없다. 사모펀드 역시 급격히 육성되면 마구잡이식 투자가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정부는 법적 제도를 마련해 주되 지난 수년간 기업구조조정 시장에서 경험을 쌓은 국내 기관들이 스스로 규모를 키워가도록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그리 되면 경영권 방어는 부산물로 얻을 수 있다.

이창용 서울대 교수. 경제학 한국채권연구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