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프리즘>95KBS 연기대상 나문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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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누구나 주인공만 하고 싶은 시대,30년 외길로 조역연기만 해온 연기자가 있다.지난해 12월31일 KBS연기대상을 수상한 영예의 주인공 나문희(54)씨.그는 연기자의 길은 두갈래라고 말한다.하나는 화려한 주인공의 길,또하나는 주인공 의 그림자로불리는 조역의 길이다.아무나 스타가 될 수는 없다.조역연기도 마찬가지다.빼어난 외모와 개성이 주인공의 조건이라면 넉넉한 마음과 폭넓은 연기는 조역의 조건이다.이건 30년 연기생활이 그에게 가르쳐준 살아있는 교훈이다.그는 스포트라이트가 어둠이 짙을수록 더 밝아보인다며 「그림자 연기론」을 털어놓는다.주역보다빛나는 조역 나문희씨,그를 만났다.
젊은 미녀 연기자들이 극구 꺼리는 역이 있다.장애인.환자.노인역이다.미모가 가려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 상품가치도 떨어지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는 늘 있다.28세 첫 배역부터 어머니역으로 시작한 나문희씨가 그렇다.하숙집 할머니.근엄한 교장선생님.괄괄한 시어머니.30대의 나이부터 그는 얼굴에 검버섯을 그리고 검은머리를 흰머리로 물들여야 했다.
『거부감은 없었어요.미모가 좀 부족하구나 생각했죠.할머니역은할머니가 돼서도 할 수 있잖아요.평생직업으론 안성맞춤이죠.』 나씨가 방송일을 시작한 것은 61년.MBC라디오 성우1기생으로다.성우는 그후 15년간 그의 직업이 됐다.그중간쯤 잠깐 외도를 했다.69년 드라마 『이상한 아이』출연이 그것이다.지금은 고인이 된 극작가 김기팔씨 작품에 이대근의 어머 니역을 맡은 것.이 드라마 출연은 그의 인생을 오디오 배우에서 비디오 배우로 바꿔놓는다.그후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줄잡아 50여편.괄괄하고 기운찬,그러나 악의없는 노역연기가 주종이었다.
76년 그가 한차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때가 있었다.MBC의 일일연속극 『여고동창생』출연때다.35세의 나이로 맡은 첫주인공인데다 처녀역이어서 더욱 화제가 됐다.웬만한 탤런트같으면별 얘깃거리도 아닐 일이다.시작부터 어머니.할 머니로 노역연기만 맡았던 그이기에 이 드라마의 봉란이역은 두고두고 그를 따라다녔다.당시 그에게 붙은 「뽕난이」란 애칭을 나씨는 지금까지 사랑한다.무엇보다 뽕난이는 어떤 연기도 소화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에게 심어준 「고마운」배역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자신없는 역이 있어요.악역이죠.악역은 맡은것도 몇 안되지만 연기도 잘 안돼요.』 딴에 멋지게 해냈다고 생각하는데도 보는 이들마다 왠지 밉지않고 정감스럽다고 한마디씩한다.천성 탓일까.나씨는 제대로 된 악역연기는 못할 팔자라고 위안삼기로 했다.
나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생활력이 별로 없었던 부친이친척과의 동업을 위해 중국에 정착한 탓이다.해방이 되던 해 귀국해서는 줄곧 서울 종로일대에서 자랐다.지금 나씨의 트레이드마크인 평안도 사투리는 연기자가 된후 익힌 것.3 0대 중반 이웃집 평양아주머니와 어울리면서 한두마디 따라하던 것이 입에 붙었다. 그후 80년대초 『시장사람들』이란 드라마에 캐스팅되면서연출자에게 평양사투리를 써보고 싶다는 제의를 했다.나씨의 제의는 흔쾌히 받아들여졌고 드라마 배역도 평양댁으로 바뀌었다.타고난 성우였던 나씨였기에 평양사람보다 더 진짜같은 평양 사투리가술술 구사됐다.드라마 『도시인』『희망』등 그후 각종 드라마에서나씨의 평양사투리는 전가의 보도처럼 자유자재 휘둘러진다.
나씨의 평양사투리 연기가 정점에 달한 것은 지난해부터 방영중인 KBS의 인기 일일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에서다.고집센 시할머니역의 나씨는 능청과 익살을 능수능란하게 섞어가며 이 드라마가 평균 시청률 40%대로 1위행진을 계속하는데 1등공신이 됐다.지난해 연기대상 수상도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그의 열연과무관하지 않다.
그에게 수상소감을 물어봤다.
『미안해요』가 첫마디였다.사람좋은 연기자 김무생씨에게 미안하고,너무너무 열심히 연기한 한진희씨에게 미안하고,애순역 박성미도,둘째며느리역 윤유선이도 그렇게 애썼는데 아무 상도 못받아 미안하다는 것.
『편안하다고들 하세요.예쁘게 봐주신 시청자들이 고맙죠.』 자신의 연기를 평해달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나씨의 편안함은 틀을 싫어하는 그의 연기관에서 나온다.틀에 얽매이기 보다순간순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연기가 진짜 연기라는 믿음이다.
그러다보니 가끔 트러블도 생긴다.
『꼭 각본대로만 하라는 연출자와 만나면 껄끄러워요.연기자만의호흡이 분명 따로 있거든요.』 이런 얘기를 할때 나씨의 모습은평소와 분명 다르다.후배연기자들의 대모역할을 톡톡히 하는데다 싫은 소리 못하는 연기자로 소문난 푸근하고 따뜻한 모습은 간데없다.연기에 관한한 그에게서 양보심을 기대하기 어렵다.평소에는사근사근 큰소 리 한번 내지 않는 나씨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놀줄 아는」것도 그런 열정 탓이라고 그를아는 이들은 입을 모은다.
방송외에 나씨가 서고싶은 곳은 연극무대.65년 극단 「산하」의 『천사여 고향을 보라』가 사실상 연기자로서의 첫 무대였다.
최근에 출연했던 『길떠나는 가족』까지 시간이 허락하는한 그는 연극무대에 섰다.
『연극무대엔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는 연기의 맛이 있어요.생생함이죠.』 객석앞에 설때면 늘 긴장이다.NG가 없는 무대이기때문이다.
나씨의 연기철학은 화합이다.
『혼자 돋보이려고 하면 극이 엉망이 돼죠.그러면 결국 아무도돋보일 수 없게 됩니다.』 극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한마음이될때 비로소 극도 살고 배우도 산다는 얘기다.그에게 이런 철학을 가르쳐준 건 시간이다.
『세월이 흐르면 나무는 나이테를 만들고 연기자는 연륜을 만들지요.연기는 인생같아요.쌓이면 넉넉해지지요.』 말을 마친 나씨의 모습은 그대로가 넉넉함이었다.
글=이정재.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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