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화 봉송 … 다시 긴장에 휩싸인 라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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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앞에서 시위 진압 경찰이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유혈 사태가 발생한 지 100일째가 되는 21일 열리는 라싸 성화 봉송을 앞두고 라싸 전역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다. [라싸 AFP=연합뉴스]

20일 오후 도착한 티베트(중국명 시짱·西藏)의 중심 도시 라싸(拉薩)는 언제 유혈사태가 있었느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맞았다. 티베트 언어로 ‘신성한 땅’이라는 뜻을 지닌 라싸는 해발 3600m를 넘는 곳이어서 그런지 이름에 걸맞게 하늘과 구름이 땅에 내려와 앉아 있는 듯한 신비감을 선사했다.

3월 14일 분출한 티베트인들의 독립 시위와 중국 당국의 무력 진압으로 빚어진 혼돈의 현장은 겉으로 보기엔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식이 이곳 라싸에서 열리기 하루 전이라 그런지 시내 거리 곳곳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유혈사태가 발생한 지 100일밖에 되지 않아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에는 아직 이른 듯했다.

티베트인들의 반발에도 중국 정부가 라싸 일정을 축소해 21일 하루 성화봉송을 강행하기로 함에 따라 기습시위가 우려되고 있다. 티베트 자치구 정부와 라싸시 공안은 치안을 대폭 강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거리에는 ‘중국인은 올림픽 (성화봉송) 응원을 지켜내야 한다(中國人保衛奧運加油)’는 구호가 나붙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시민은 “오늘과 내일은 시내의 차량 운행도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공항에서 라싸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시위진압 방패 등 장비와 병력을 가득 실은 무장경찰 트럭이 어딘가로 급히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도로 곳곳에도 교통 경찰이 배치돼 차량의 운행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성화 봉송 이벤트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이날 주요국의 대표 언론들을 초청했다. 이에 따라 3월의 유혈 시위 이후 100일 만에 한국 신문 매체로서는 본지가 처음 라싸 현지를 취재할 기회를 잡았다.

중국 정부의 취재 개방 조치는 티베트 독립 시위에 동정적인 국제 여론이 5월12일 쓰촨(四川)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잠잠해진 데다 티베트 지역의 치안 질서를 회복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9만여 명이 희생된 쓰촨 대지진 이후 중국에 대한 반감이 동정론으로 반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지 당국은 20일 외국 언론인이 개별적으로는 포탈라궁과 다자오쓰(大昭寺:조캉사원)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티베트의 젊은 승려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아 3월 시위의 거점 역할을 했던 저펑쓰(哲蚌寺)도 접근이 어려웠다. 외국 언론이 모여든 상황에서 티베트 젊은이들이 올림픽 반대를 외치며 기습 시위를 할 수 있다고 우려한 중국 당국이 통행을 제한한 것으로 보였다.

중국 정부는 6월 초부터 내국인 관광객의 티베트 여행을 허용했다고 밝혔지만 이날 라싸 시내에서는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싸의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어카에 과일과 채소를 싣고 나온 노점상들도 눈에 띄었다. 한 상인은 “3월 시위 이후 지역 경제가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나마 6월부터 관광객이 다시 들어오면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칭짱(靑藏) 철도가 개통된 이후 연간 수백만 명으로 늘어났던 관광객을 감안하면 성수기로 접어드는 6월이 여전히 비수기나 다름 없다는 푸념이다.

지금 라싸는 1년 중에 공기 속의 산소량이 가장 풍부할 때라고 한다. 중국 정부의 주장처럼 라싸와 티베트 전역에 다시 평온이 회복됐다지만 티베트인들이 느끼는 자유의 절대량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공기 중의 산소량이 가장 많은 때라고는 하지만 가쁜 숨을 연신 추슬러야 했다. 수시로 가슴과 뒷머리를 압박해 오는 기압을 느낄 수 있었다.

13억 중국 인구 중 90%가 넘는 한족(漢族)에 비해 540만 명에 불과한 티베트인들은 극소수이자 약자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세계 경제 대국’을 이끄는 한족의 지배에 편입되길 한사코 거부하고 있을까. 가난하더라도 신성한 그들만의 이상향을 자기 힘으로 가꾸고 싶어서일까. 물질 생활을 윤택하게 해준 문명의 이기들보다 더 숭고한 어떤 가치를 위해서일까. 라싸 땅을 밟으면 쉽게 풀릴 것 같았던 이런 의문은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았다.

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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